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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및 독립기념관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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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호 작성일19-05-01 07:47 조회82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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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및 독립기념관을 다녀와서

<가는 길에>
  평창문화원에서는 올해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서, 오전에 서울 효창공원의 백범 김 구 기념관과 그의 묘역 및 의열사와 그들의 묘역 등을 돌아보기로 했다. 오후에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으로 가서 그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오늘(19.4.26,금)은 문화원에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직 자주, 민주적으로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의 묘역 등을 찾아뵙는 날이다. 어제 저녁 뉴스를 보면서도 일기예보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기상캐스터는 ‘중부지역에 오전에만 비가 조금 내리고, 오후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집을 나가면서도 비가 조금 왔지만, 우산은 가지고 가지 않았다.

  문화원에서는 작년부터 일정을 1박2일에서 당일로 바꾸면서, 문화원 수강생들을 포함해 버스 3대로 출발한다고 했다. 모이는 장소로 나갔더니, 벌써 여러 사람이 나와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시간이 되자, 가려는 사람들이 모두 시간을 잘 지켜 정시에 평창을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문화원장의 인사에 이어 탑승자 전원이 본인소개를 했다.

  장평에서 잠깐 기다려 버스가 모두 도착하자 함께 고속도로에 올랐다. 평창에서 출발한 차는 1호였으나, 내리지 않고 기다렸으므로 2,3호차에 누가 탔는지 몰랐다. 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높은 곳은 안개가 끼었으나, 버스는 제 속도를 내며 달렸다. 일행은 원주기사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하면서 다른 차에 타고 온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버스는 다시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달리기 시작했다.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는데 ‘용인휴게소라며 15분간 휴식을 취하라.’고 한다.

  용인휴게소 간판은 약간 서쪽에 있었다. 그것을 찍고 있는데 마침 같은 차를 타고 온 한문붓글씨 선생님과 한문붓글씨 회장 사모님이 포즈를 잡았다. 차창 밖은 잔뜩 흐려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강이 보이고 남산타워가 보이자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는 감이 왔다. 버스가 한남대교나 제일한강교를 건널 것으로 생각했으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버스는 여의도에 있는 다리를 건너 좁은 길을 빠져나가 효창공원에 도착했다. 사무국장은 기념관 옆 주차장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개인별로 효창공원의 요소요소들을 돌아보고 버스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용인휴게소>

<용인휴게소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일행>

<용인휴게소에서 포즈를 취한 일행>

<효창공원을 돌아보며>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사적 제330호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묘원이다. 여기는 조선 정조의 맏아들 문효(文孝)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처음에는 효창묘(孝昌墓)라고 했다. 그 후에 왕가의 묘를 몇 기 더 모셨고 고종7년에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본래 효창원은 청파동과 효창동 일대로 수림이 울창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일본 군대가 불법으로 주둔하면서부터 이곳을 훼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제 말기(1945.3.)에 묘들을 고양군 서삼릉(西三陵)으로 강제로 옮기고 이곳을 효창공원으로 했다.

  광복 후 김 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를 이곳으로 모셨다.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李東寧), 차리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의 유해를 이곳에 모셨다. 1949년에는 김 구(金 九) 선생의 유해도 이곳에 모셨다. 공원 남쪽에 효창운동장이 있어,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일행은 백범기념관 앞 주차장에서 단체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각자 알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먼저 주차장 옆에 있는 “백범 김 구(白凡 金 九) 선생 기념관”을 찾았다. 그의 일생은 다사다난했으며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 및 통일에 바치신 우리겨레의 영원한 스승이고 민족의 지도자였다. 우선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범기념관 앞 주차장에서 단체기념사진을 찍고>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다. 1876년 항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서 1949년 육군 장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조선왕조의 부패에 항거하여 동학(東學)에 참가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쯔치다(土田)를 처단하여 이 나라에 충절이 있음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이(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그것의 철폐를 위해 투쟁했다. 또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국권수호에 앞장서는 등 애국운동에 투신했으나, 일제는 “안악사건”을 꾸몄으며, 그는 서대문과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부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다. 그는 한국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정의 위상을 높였다. 임시정부가 일제의 강압을 피해 상하이(上海)에서 중칭(重慶)으로 옮기면서 27년간 조국광복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還國)해 신탁통치(信託統治)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 소(美. 蘇) 등 강대국의 한국분할정책에 맞섰다.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것이 곧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을 가져올 것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남북협상에 앞장섰다. 남북에서 각각 분단국가가 수립된 후에도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7월 5일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효창공원에 봉안했다.

  백범기념관은 2000년6월에 시공해서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했다. 이것은 격동의 한국 근. 현대사와 함께한 김 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이해하고 조국의 자주, 민주,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나가는 온 겨레의 삶의 공간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것들은 대부분 사진과 자료들이었으나, 매우 중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을 텐데도 그 때의 사진들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서산대사가 지었고, 백범선생이 좋아했다는 한시가 한 편 있었다. 또한 이것을 직접 쓴 행서체 글씨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踏雪野中去 不湏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 전경>

<기념관의 백범 김 구 선생 상>

<기념관에 전시된 나의 소원>

<전시된 기념사진>

<백범 선생이 직접 행서체로 쓴 글씨>

  1층과 2층에 전시된 자료들을 보고, 1층 매장을 둘러보았다. 별로 넓지 않은 장소에 백범선생을 추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백법일지(白凡逸志)”를 한권 구입했다. 이 책은 백범선생이 자신의 생애를 직접 기록한 자서전으로, 일지(逸志)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란 뜻이란다.

  “백범선생의 묘”는 기념관 담장 옆의 산봉우리에 있었다. 묘에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양옆에는 반송이 줄을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묘는 부부합장이었으며, 옆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백범김구지묘(大韓民國 臨時政府主席白凡金九之墓)”라고 전서로 쓴 비석이 있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과연 좋은 자리란 느낌이 들었다.

<백범 김 구 선생 묘를 오르는 길>

<백범 김 구 선생 묘>

<백범 김 구 선생의 비석>

  기념관 동쪽으로 조금 내려오자 “의열사(義烈祠)”가 있었다. 이것은 1990년에 준공했으며 독립운동가 7인(이동녕, 김 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효창원 7위 선열 의열사 제전’을 거행하고 있다. 의열사는 그동안 제한적으로 개방했으나,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 2016년 5월부터 언제나 열려있다.

<임정요인>

  이동녕 :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 외 2회, 초대 주석 외 3회

  김 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조성환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부장

  차리석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

<삼의사>

  이봉창(1901~1932) : 일본 동경에서 일왕에게 폭탄투척 의거

  윤봉길(1903~1932) :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 대장에게 폭 탄투척 의거

  백정기(1896~1934) :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결성, 중국 상해 육삼정 의거

<의열사(義烈祠) 정문> 

<의열사(義烈祠) 본 건물 전경>

<의열사 안의 삼의사 영정>

<의열사 안의 임정요인 영정>

  의열사 동남쪽 봉우리에는 “삼의사 묘(三義士 墓 :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가 있었다. 묘역을 오르는 길은 백범선생의 묘와 같았다. 계단 위의 삼의사 묘는 백범선생의 주선으로 1946년에 이곳에 안장되었다. 삼의사 묘 왼쪽에는 중국 여순 감옥에서 순국(1910.3.26.)한 안중근(安重根, 1979~1910)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한 빈 무덤이 있었다.

<삼의사 묘역을 오르는 길>

<삼의사 묘역, 왼쪽은 안중근 의사의 가묘임>

  삼의사 묘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니 연못 등 산책코스가 있었다. 거기서 동쪽에 있는 언덕을 오르자 “원효대사 상(元曉大師 像)”이 보였다. ‘원효대사(617~686)는 신라 진평왕 39년 경북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주적 독창적 사상가였고 신라통일의 정신적 지주였다. 두 차례나 당나라 유학을 기도했지만, 진리가 먼 이국 하늘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참됨과 속됨, 더러움과 깨끗함을 가리지 않는 평등함을 얻어 널리 만인을 위해 일하는 행동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라는 뜻의 글이 상(像) 뒷면에 적혀 있었다.

<효창공원 안의 이정표>

<효창공원의 시설물>

<원효대사 상>

  원효대사 상 옆으로는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 주위 분들이 공원을 오르내리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되돌아오는 길의 삼의사 묘역 앞에 창열문(彰烈門)이 우뚝 서 있었다. 의열사 앞 길 부근에 이봉창 의사의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모습의 상(像)이 있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 기상만은 세상에 널리 알렸다.

<창열문(彰烈門)>

<이봉창 의사 상>

  공원 경내에 있는 효창운동장은 서울에 살 때, 여러 번 와서 공을 차기도 하였던 곳이다. 다만, 백범기념관이나 의열사 등의 건물은 없었다. 그 때는 묘역을 다니지 않았다.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순국선열들의 사당과 묘역 등을 참배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여의도에 있는 “봉평 우(牛)가네 막국수”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은 아주 넓어, 일행 80여명이 들어가도 일반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주인은 봉평 사람으로 일행 중에서도 몇 분은 알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막국수를 먹는다.’고 생각했으나, 식탁 위에는 불고기가 맛있게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천안 독립기념관을 향했다.

<독립기념관을 돌아보고 돌아오며>

  독립기념관 주차장에 도착하니 15시쯤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독립기념관을 둘러보고 16시 반까지 나오라고 했으나 아무리 빨리 보아도 다 못 볼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독립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평지였으나 상당히 먼 거리였다. 일행 중에는 연령차가 많아 젊은 사람은 빨리 걷고, 나이 드신 분들은 천천히 걷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독립기념관의 상징물인 겨레의 탑에 가까이 가자, 뒤의 독립기념관이라는 간판이 써져있는 한옥(겨레의 집)이 거의 가려진 상태였다. “겨레의 탑(Monument to the nation)"은 높이가 51.3m이다. 겨레의 탑은 막 대지를 박차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양손과 같기도 한 독립기념관의 상징탑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영원불멸하게 웅비하는 한민족의 기상과 자주와 독립, 통일과 번영에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란다. 일행은 이것을 배경으로 단체기념사진을 찍고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독립기념관 앞의 "겨레의 탑" 전경>

<"겨레의 탑" 앞에서 단체기념사진을 찍고>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전시물로서“애국 시 어록 비”가 있었다. 이순신 등 예전에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김 구 등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독립의지가 담긴 어록이었다. 짧은 글 속에 응축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계승되리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애국시. 어록비 안내도>

  겨레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백련 못”이 있어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어울리게 하는 것 같았다. 또한 겨레의 집 앞쪽의 “태극기 한마당”에는 태극기를 수없이 걸었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터널천장에도 엄청난 양의 태극기를 걸어놓아 비가 조금 내렸음에도 옷이 젖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올해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림 100주년을 기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의 태극기가 훼손되기 전에 갈아 끼우는 것도 상당한 예산과 인력이 들것 같았다.

<백련 못 풍경>

<"겨레의 집" 가는 길의 태극기 터널>

  가는 길 오른쪽에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가 있었다. 왜 이것이 생뚱맞게 독립기념관에 설치되었는지 궁금했는데 곧 해소되었다. '이 비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석질, 형태, 글씨로 제작된 것이다. 높이 6.39m, 무게 38t에 이르는 비는 동양에서 가장 크다. 4면에 새겨진 1802자의 비문은 고구려 건국과 왕위계승, 광개토대왕의 정벌활동 및 왕릉을 지키는 제도와 대왕의 유훈이 담겨져 있어서, 한국 고대 고구려의 웅장한 역사를 알려주는 증표(證票)이기도 하다. 이 비가 있는 현장을 대부분 직접 찾아보기도 어렵고,  주변국들은 역사왜곡을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광개토대왕릉비를 다시 새겨 세우는 이유는 첫째, 민족의 웅대한 역사를 복원하고, 둘째, 원래의 비가 예상치 않은 손실을 입었을 때를 대비하여 후세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있다. 글씨는 타이완 중앙연구원과 중국 베이징대학에 소장된 정탁본(精拓本)을 모본(母本)으로 삼아,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이형구(李亨九)교수가 고증했으며, 정과 망치를 사용해 손으로 새겼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

  오늘 독립기념관에서 학생들이 무슨 연주를 했는지 비가 조금씩 내림에도 불구하고 의자와 전기줄 등을 차에 싣기에 분주했다. 일행모두가 함께 단체사진을 찍을 수 없음을 알자, 먼저 온 사람들이 “겨레의 집”인 “독립기념관”간판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겨레의 집 안으로 들어가 건물 안의 조각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전경>

<독립기념관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독립기념관 간판이 걸린 안의 조각>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와 조금 걸은 뒤,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먼저 제1전시관인 “겨레의 뿌리”에는 구석기문화가 시작된 이후, 우리 민족이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것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인 1860대까지 찬란한 문화유산과 불굴의 민족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2전시관인 “겨레의 시련”에는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친 개항기와 개혁기를 지나 우리민족이 일제의 침략으로 고생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여기에 전시된 것들은 너무 잔혹하다고 할 만큼, 일본 순사들과 일본군들이 우리 양민에게 고통 주는 것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대충 보았음에도 벌써 16시가 넘었다.

  우리는 9개의 전시관 중에 겨우 2개만 보았고, 야외전시실도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105인 층계” “추모의 자리” “C-47수송기 전시장” 등 여러 곳은 보지 못했다. 우리가 본 2개의 전시관 중에도 영상은 볼 수 없어 아예 포기했다. 겨레의 집인 한옥지붕 건물로 오기 위해 전시관을 나오자, 밖에는 비가 더욱 많이 내렸다. 일기예보에 오후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으나, 아마 오늘은 그것이 틀린 것 같았다.

  겨레의 집 바로 뒤에는 북관대첩비가 있었다. 글씨는 작고 마모되었으며, 한문 실력이 약해 읽을 수 없었다. 옆에는 비(碑)에 대한 설명문이 있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북평사(北評事) 정준부(1565-1624)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와 백탑교 등에서 ”가토기요마시(加藤淸正)가 이끄는 왜병을 격파한 승전비다. 그러나 정문부선생의 업적은 그를 모함한 무리에 의해 가려지고, 오히려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43년 후에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85년 뒤에 그곳에 부임(1708)한 함경도 북평사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북 길주군 임명(臨溟)에 고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은 약 200년 후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있었다. 그 후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수차례 노력해서 반환(2005.10.25.)받았다. 반환 받은 비(碑)는 남북협의에 따라 2006년 3월 1일에 북한에 인도되어 본래의 자리인 함북 김책시(길주)에 복원되었으며, 독립기념관 뒤에 건립된 비(碑)는 원래의 비를 그대로 복원하여 2006년 7월 4일에 세웠다.’고 한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일행 대부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대충 보며 다녔음에도 2개 전시관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들은 얼마나 부지런히 몇 개의 전시관을 다녔을까. 비를 맞으며 겨레의 큰 마당 중간쯤에 왔을 때, 평창문화원의 남자직원이 우비를 주었다. 뒤에 몇 분이 남았다고 말하고, 우비를 입고 나서 버스로 향했다.

  버스에서 기다리면서 오후의 일정인 독립기념관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오늘은 전시관을 2개만 보았지만, 나름대로 부족한 것 두 가지가 느껴졌다. 첫째, 전시관이 상당히 넓었고 꾸불꾸불해서 왔던 곳을 되돌아가는 등 하나의 전시관이라도 모두 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복잡한 곳은 동선을 만들어 놓았으나,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둘째, 제1전시관의 첫 전시품인 고인돌의 모습이었다. 아주 커다란 돌인 것 같았으나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공모조품이었다. 어딘가 사기를 당한 것 같았다. 따라서 전시관에 전시된 물건들이 야외전시실의 광개토대왕릉비처럼 진짜와 같이 복제한 것인지, 아니면 고인돌과 같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공모조품인지가 궁금해졌다.

  버스는 예정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독립기념관을 출발해 경부고속도로로 오다가 중간에서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버스는 음성 금왕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녁은 제천의 한식뷔페에서 먹었는데, 음식종류가 다양하고 기격도 헐해 기분 좋게 먹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80여명의 인원이 들이닥치자 처음에는 무척 복잡했다.

<충북 음성의 금왕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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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타고 온 버스 3대>

  거기서부터는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목적지가 모두 달라서 뿔뿔이 흩어졌다. 평창으로 오는 버스는 연당을 거쳐 문화원장이 마무리인사를 했다. 비가 조금씩 내렸으나 많이 오지는 않았다. 문화원에서 1년에 한 번씩 주관하는 문화기행은 매번 참석하지만, 그 의의가 매우 큰 것 같았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 기행한 장소를 보았을 때 많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 기다려지는 것은 비록 나뿐일까.

댓글목록

평창문화원님의 댓글

평창문화원 작성일

좋은 글 의미있는 답사기 감사합니다.
사진이 올라가지 않아 살짝 아쉽지만 그래도 당시 상황을 충분히 상상하며 감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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