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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비파형동검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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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9-17 16:05 조회3,47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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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上> 평창 하리 발굴 청동기 유적 석실내부로 피장자의 유골과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
사진下>평창 하리 청동기시대의 유적 발굴  14기 전체 약도

[평창에서  비파형동검 발굴]
 
후세백작 2016.09.11 00:20
강원도 평창의 옛 무덤(평창읍 하리 240-4)에서 한반도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년)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함께 나왔다. 나란히 출토되기는 처음이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진행한 평창군 하리 건물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에서 기원전 500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비파형동검과 피장자의 인골을 동시에 확인했다고 문화재청이 8일 밝혔다.

발굴 조사 결과 판석으로 만든 청동기 시대 석관묘 14기를 확인했으며, 이 중 9기에서 피장자의 매장부가 발굴됐다.
 특히 2호 무덤은 장축 2.04m의 대형 석관묘로 형식과 크기가 주변 다른 무덤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여기서 곧게 편 형태로 매장된 인골과 나란히 비파형동검이 출토됐다. 청동기 무기 혹은 제기로 지배층의 부장품으로
알려진 비파형동검이 함께 묻힌 것으로 봐 2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지역사회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26.3㎝, 최대폭 3.8㎝의 비파형동검은 동검을 구부려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석관에 매장됐다.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부터 퇴화된 세형동검으로 변해가는 과도기 유물이다.
이번에 발굴된 인골과 비파형동검은 무덤 조성 시 사용한 석회암 등으로 인해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이 특징이다.

이번 발굴조사로 청동기시대 시신 매장 방법과 장례 풍습 등 선사시대 무덤 연구에 필요한 중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향후 추가 연구를 통해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DNA 분석 또한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개인주택 신축부지에 대한 소규모 발굴조사로 진행됐다. 2013년 입회조사를 통해 토기 조각,
 마제석검편 등 유물이 수습돼 청동기시대 무덤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706㎡의 사업부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추진됐다. 이번 발굴조사의 성과는 9일 오후 2시 평창군 평창읍 하리 240-4번지에서 열리는
현장설명회에서 공개된다.

피장자는 지역사회의 유력자였을 것”이라며 “인골이 썩지 않고 비파형동검도 녹슬지 않은 이유는 무덤을 조성할 때
사용한 석회암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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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비파형동검/정원대

평창 서 남쪽 3리
포근한 산자락에 고을의
수장이 잠들고 있으니

판석조 석관묘에는
인골과 허리 측면에
한 개체를 부러뜨린 비파형동검
세월의 역사를 지켜 주고 있는데

앞산 아래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사이로
부족들이 옹기 종기 모여
기름진 땅을 일궈
이 땅에 뿌리 내리니

판석조 판관묘:청동기 시대 추정
위치:평창군 평창읍 하리 240-4 . 240-12
출처:강원고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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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16.09.10. 23:43
비파 즉 요즘의 악기인 기타같은 에스 곡선의 주름에...지금 차고 다녀도 멋있슬 칼인데...군인들의 대검이랑 비슷한,,, 

인간의 문명의 시작엔 철을 만드는 제련법을 발명으로<바그다드의 힛타이트족이 발명한것임> 철기문화가 시작되나
나무의 화력으론 주철 생산에 약 200도 온도가 모자라서 구리에 주석 합금의 청동기 시대가 도래된다.

이렇게 만들기 어려운 청동검이 이번에 평창에서 출토된 점은,,,당시 평창의 권위를 이야기 하는듯 합니다.
청동가는 나무의 화력에서 잘 녹으나 제련술이 까다로워 많이 번창하진 못했습니다.
즉, 청동기가 문명의 판도를 크게 변혁시키진 못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비파형 청동검은 고조선 시대의 발명품으로 전국에 40여개 발견되었으나 아직 이 청동검 녹여 붙던 거푸집이 발견이
않되어서 아직은 국산인지,,, 국내 기술인지,,,그 구분이 모호한듯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 14기 발굴에 9기에서 매장부가 발견되는데 인골과 청동검이 동시에 발굴됨으로 청동기시대인
고조선 인들의 연구도 가능해진점에 학계는 흥분할 것이고 고조선 문화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선사시대의 역사를 가지고있는 어패는 분명 고조선시대에도 문자가 있던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역사시대인 것이다.

이번 평창시내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인골과 석관묘, 비파형 동검은 우리 역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무덤속의 검이 부러졌네요.
이것은 칼로 정의하고 지배하는 한많은 세상과는 연을 끊으라는 표시인듯.

지금도 면면히 흐르는 고조선 유물의 문화엔 막새무늬 기와의 도깨비상이나 축구의 붉은 악마 상징그림등은
고조선의 치우천자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주변엔 고조선 문화가 남아있고 발전된 것과 풍습도 있습니다.
이에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일전의 극구사우 이야기중에 목조비 돌산 정씨의 묘는 서산 4리나 이 글에서 서남쪽 3리에서,,,
이 깃점은 조선시대엔 현 포교당쯤의 중리가 중심이었던듯 하며, 하리는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쌓으며 생긴 마을이다.

평창시내를 막아주는 제방이 없다면 옛 면사무소 앞 대로를 기준으로 천변리, 하리 시장등은 수해에 침수가 되는 저
지대이기에 옛 평창마을은 중리였으며, 이번 발굴유적은 고향집은 하리39~2번지로 이곳으로부터 약 800m정도
떨어져있다.
그러기에 평창엔 아주 상고시대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점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이번 발굴의 특이한 점은 동검은 석실무덤에 청동기시대인의 인골과 같이 발견되었기에 청동기 시대인의 증명엔
어려움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이 석실무덤들은 하평리 산자락이 끝나는 개활지에 있으며 이 골자기 일대를 지금은 방칫골이라 불리며 풍수사상의
산세가 좋아 향교를 위시하여 수많은 묘들이 공동묘지를 형성하고 있지만, 옛 석기시대인들은 이 구릉이 비옥한 토질의
배사토라 농경이 쉬운점등으로 이곳에 정착하였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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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1리의 길이는 다릅니다.
현대 1리가 392.727미터입니다. 10리가 3927.27미터 3.927km로 약 4km라고 하는것이죠.
세종 때는 1리가 374,31미터,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조선 후기엔 1리가 540미터,
 대한제국 때는 1리가 420미터였다고 한다.
조선 이전의 시대의 단위는 달랐던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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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기상,,,
조은 역사 詩,,,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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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7.15;51
그리고 극구사우에 관한 문제는 위 본문에서 예시한데로 과거 조선시대엔 하리는 강변이 대부분일테고
평창의 중심은 중리였다.
메밀꽃의 이효석 선배님은 현 중리 감리교회 자리의 평창초교 를 다녔고 이후 평창시내 일원의 제방이 쌓게되며
하리의 평창초교로 이전한 것이다.
이렇듯 중리가 평창시내로 풍수적으로도 지금의 극락사 자리가 옛날엔 평창 1번지 행정기관이었슬 것이다.
대게의 절은 천년사찰이지만 이 극락사는 초대 국회의원도 역임한 이종욱 월정사 주지스님이 50년대에 포교당을
건립한 것이다.
극구사우의 잔여 유적이나 문제는 여기서 찾아야 할듯한 생각이다.

또한 극구사우에 관한 이숙의 부인 돌산 정씨의 묘가 서산 4리에 있다고 실록에 명기되었다 하는데...
자칫 4리는 지금의 10리로 오인하여 유동의 평창이씨의 문중묘중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인인 것이다
서산 4리란 표현에 깃점은 당시의 관헌인 현 극락사가 깃점으로 위의 도표로 환산하면 대략 1,2km에
 위치하여야 한다.

극구사우의 제례는 목조비인 5대조의 장인어른에 대한 공경이라면 그 당사자인 평창이씨 이숙의 부인
돌산 정씨의 무덤을 찾아보는것도 도리인 것이다.(왜냐면 이조실록에 구체적 거리까지 표시되었고
 이성계의 명이 있었기에 분명 이 묘에 묘비는 갖추었슬것이란 점에 착안하여 그 비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가령 6,25때 워커와 김백일 장군의 명령에 당시 그곳에있던 벌목공 인부들이 월정사 당우 21채를 전부 불태웠으나
석조탑인 8각9층 석탑은 이러한 화마에도 살아남았듯이 이 석조 비석은 쪽바리 넘들이 정으로 쪼아 글자를 파손치
않았다면 지금도 알아볼 정도의 비문은 있으리란 생각이다.

사실 이 점의 파악에 여러 형태로 탐문결과 대상체는 떠오르지만 아직 이를 찾기엔 좀더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서산 4리에 있기에 그곳을 찾아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론 우리 평창이 잃어버린 소재들,,,
그 역사도 하나 하나 정확하게 기록하겠습니다.
지금은 중요치 않게 생각하여도 먼 후일을 위해 역사는 기록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극구사우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 바로 그 추론까지 씁니다.
과거 이조때 관헌이 현 극락사 자리엿고 일제 강점기시 평창읍 제방이 축조되며 평창초교도 하리로 이전될때
아마 조선 후기엔 현 읍사무소 자리로 관이 이전된듯 합니다만,,,
이러한 이전이 있었다면 관헌 옆의 극구사우 사당은 아마도 그 자리어 남았슬수도,,,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제를 지니는게 끊어지고 포교당을 짓기위해 사당이 정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 극락사 어디엔가그 유물이나 흔적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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