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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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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12-03 01:03 조회4,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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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삿갓(난고 김병연;1807~1863)의 고뇌와 그의 해학, 풍류적 시성을 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월과 김삿갓의 연관성에 이해가 곤란한 모순을 열거하며 오히려 이러한 예로서 영월은 김삿갓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운 결과를 자초한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명가 안동김씨 후손들에의해 김립시비를 제막하는등 후손들이 잘 알고있슬 그의 역사를 오도하자는 것도 아니며, 다만, 영월과 김삿갓과의 연관성에 관한 나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로인한 추론등을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필함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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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은 6~70년대 TV가 없던시절에 라디오에서 5분드라마 "김삿갓의 북한 방랑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가 방랑시인이고, 옳치않은 것에 관해서 쓴 소리로 풍자하여 시원하게 느껴지던 이야기에, 특히 김일성 괴수를 통열히나무라던 5분 드라마, 괴수위에 방랑시인 김삿갓이 더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듣던 인상에 김삿갓은 우리에게 더 친근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월의 김삿갓 이야기에서 선듯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에 관해서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추론해본다.
일반적인 김삿갓의 일대기중에서 보면,,,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요,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흔히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부른다.
그의 조상은 당시 권력가문인 안동 김씨 집안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益淳)이며, 평안도 선천부사로 남부러울것이 없는 집안이었다.

그가 다섯 살 때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평안도 선천부사로,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반군에게 항복해 직함을 받기도하여 모반대역죄로 다음해 3월 참형을 당했다.

이로 인하여 집안은 손자까지도 모두 멸족이 될까봐 걱정하여 손자인 병하, 병연은 노복 김성수가 데리고 자기 고향인 황해도 곡산의 시골집으로 숨어들었고 거기서 한문을 공부하게 된다. 당시 병하는 여덟살과 병연은 여섯살(홍경래난때는 다섯살) 이었다.

갑신정변때 일본으로 망명하지 못한 개화당은 처형되는데 서재필만 보더라도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미국행 하지만 그의 부모와 형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렇듯 역모의 반란죄는 3족이 멸하나 당시 이 책임은 당사자인 김익순에게만 묻고 이하 가족들은 멸족이 아닌 폐족으로 결정되었으며 또한 역사에서 보면 폐족이 되는순간 노비로 끌려가는데. 당시 안동김씨 세력의 비호가 있었던듯 하며,아버지 어머니와 두형제 그리고 막내동생까지 가족은 대역죄인이라 세간의 눈을 피하여 여주, 가평등지로 옮겨다니며 홧병으로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다시 아들들을 데리고 평창 미탄의 율치의 깊은 산골로 이주하였으나 여기서도 여의치 못하자 다시 영월 하동으로 옮겨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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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터넷 글중에 왜 이렇게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피신하는 이유는 폐족이라 사람들의 질시를 피한다는 추상적 설명밖엔 없는데..그런가요??

안동김시 세도정치에 왕권은 약해지고 양반들의 횡포는 심해지는데...200여년전 세도정치 시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약 100여년간 우리민족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당시의 역사는 안동김씨의 외척세력의 60년간 지배와 이어지는 민비 척족세력의 등장으로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 양반들의 횡포로 내정은 핍박해지고 문화는 방향을 잃고 양반이나 하층민의 모든 국민의 윤리의식, 삶의 추구, 보건문제등 생활권도 지표가 없는 짐승같은 참으로 이해못할 생활로 되어갔다.
쉬운말로 언제 서술했듯이 이조 역사는 똥의 역사이고, 왕권의 피의 역사밖에 더 이상도 없는 나라였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않될 사항이라 좀 더 구체적으로 해보면,,
구한말에 미국공사 알렌의 기록중에 한대목을 보면,,,알렌일행은 박정양 공사 일행과 같이 배를 타고 가는데. 알렌은 매일아침 일등실에 있는 박 공사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려 갔는데 더 그의 방을 더 이상 들어가기가 싫다고 서술하고있다.
왜냐하면 박공사의 몸에서는 똥내가 나고 담배 댓진냄세에 씻지않은 냄새까지 온갖 악취가 나서 아프리카 토인들보다 더 지저분하고고 평했다.

사람한테서 똥 냄새가 난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발목 댕기를 풀면 똥가루가 가득 흘러 떨어지는데, 본인이 어린시절 동네에 그런 할아버지 한분이 계서서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일국을 대표하는 공사의 몸에서 지독한 똥내가 나다니 참으로 이상스럽겠지만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뒤도 안딱고 다니고 똑같은 생활권 문화이다.
펄벅의 대지에 왕릉과 오란은 결혼전날 세숫대야의 물에 평생 처음 목욕재게 하지만, 목욕은 커녕 양치질, 세수도 안하고 평생 머리도 감아본적 없는게 모든 국민의 일상이었다.

여기에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은 한국여자를 사랑하지만 이뿐여자는 단 한사람도 없다 한다. 얼굴은 트고 머리는 감지않아 흐트러지고 섞혀가 잔뜩 있다 한다.
그런데 어떤 블로그엔 김삿갓의 부인이 미인이었다고 한다. 웃기지도 않는 표현이란 미인이란 단어는 일본이 만든 단어일텐데...신윤복의 미인도에 제목은 이후에 붙인 것이고...이 시기엔 미인이란 단어는 존재치도 않았슬 것이다.

그뿐인가,,우리는 옛 사진에서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사진을 볼때 우리는 참 멋진 희귀자료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더우드 부인은 청계천 물은 각 가정의 똥물이 흘러들어와 반은 누런색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물이라 기록하고 있다. 먹는 우물물도 쓰레기가 가득하고 당시엔 페스트등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당시의 남대문앞 사진엔 넓은 도로가 개똥, 소똥 말똥등 50쎈티정도에 똥이 하나씩,,,남대문을 통과하다보면 똥을 밟지않고 가기란 참으로 힘들정도라 외국인은 기록하고 있다.

구한말 민비는 일본 폭도들이 암살 시켰지만 그에 앞서 박영효 세력이 암살하려하자 유길준은 자기 세력이 암살시켜야 한다는 논지에 박영효를 밀고하였다 한다.
당시 민비의 오빠는 매일 뇌물을 받는 재미에 하루는 폭탄을 받아들고 죽었다. 백성이 왕후를 살해하려는 점에 민비의 사치와 퇴폐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말 우리나라의 사회상은 어느 외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똥내를 풍기고 다니기에 아프리카 토인들보다 더 야만적이라고기록하고있다.
이렇게 국민의 문화가 알수없는 야만인의 모습으로 곤두박질친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왕권은 힘을 잃고 국민 교육과 교화, 사회시설 정비등이 없는 국가로 몰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시작에 양반들의 횡포만 심해지는데..각 지방에서는 양반이 지배자이고 법으로 군림하여 위세를 부리며 노비들은 죽은자까지도 그 명단이 올라있어 가족에게 그 세금을 가중시키는듯 각종세금이 과다하다.그래서 양반은 노비들이 잘못하면 눈알도 뽑는게 잦아지고,,그러면 양반의 일상은 첩잘에도 신물나고 힘이 없어 하루 온 종일 방바닥에 누워 긴 곰방대에 담배는 게속 피우는것 외에는 할일도 없는일상이라,...이것이 왕권이 힘이 없어지고 사회를 돌보며 가꾸지 얺은 새도정치의 사회현상이다.

김삿갓 조부가 처형당한 홍경래의 난도 이러한 외척세력의 집권으로 사회의 비폐가 원인이고 따라서 김삿갓이 방랑하게 되는 것도 스스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피해자인 것이다.

김삿갓은 양반주도정치의 몰락해가는 문화에 자기 마음껏 양반을 후려치고 메치는 풍자적 문장의 詩를 그려보이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한 폭판에서 그 모습을 촌철살인의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모습은 시대의 아리러니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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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보면 김삿갓 집안은 반란에 가담한 대역죄인으로 3족을 멸할 위기에 처해지나 어찌보면 안동김씨라는 비호가 있었던듯 폐가가 되어 노비가 되었어야 할 것인듯 하지만,,, 그러기에 혹 양반들에게 불리면 안동김씨의 세도에 빗대어 상당히 심한 린치를 받을수도 있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세인의 질타란 표현인듯 하건만,,그런고로 김삿갓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여주, 가평에서 산간오지인 평창 율치로 옮겨 다녔고, 율치에서도 텃세부리는 양반들이 횡보라든가 하는 남의 눈에 올랐던지 다시 영월 하동의 실오라기도 마주닿을듯한 산속으로 다시 이사한 이유일듯 하다.

 그리고 병연은 과거급제에 마음을 먹고 공부를 하여 스무살이 되던해 1826년(순조32년), 영월읍내의 동헌에서 시행된 과거시험을 통해,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 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시제로 김익순의 죄에 대하여 망군 (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여 장원을 하였다 한다.

 김삿갓이 장원을 한 날 어머니는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子) 순자(淳子)를 쓰는 선천부사가 할아버지이며,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때 신주를 모시기는 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속여 왔다고 얘기하는데....
김삿갓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과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으로 인해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을 시작하고...이때부터 김삿갓은 죄인의식으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 하여 삿갓에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더욱 이상한 점은 영월 동헌서 장원급제 하던날 우리네 상식으로 신분확인의 호패는 어찌했슬까??
대역죄인의 후손이라 시험자체를 칠 수 없어야 정상일 것이다.
또한, 그가 조부인지도 모르며 탄했다고 하는데, 홍경래난은 그가 다섯살 겨울의 일이고 다음해 3월, 여섯살때 조부는 사형당하고 남부러울것 없이 자랐다면 이때부터는 노복의 시골집으로 환경이 틀려졌는데 이는 어럼풋하게나마 기억하지 못했슬까??
그래서 아둔하게 조부를 만번 죽어 마땅하다고 읊조렸슬까??

김삿갓의 시를 보면 철저한 기억력의 소유자이며 다만 시풍이 풍자적이지만 과히 시성에 버금갈 천재적 시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가 여섯살때의 기억을 못했슬까?? 또한 그의 형은 당시 여덟살이었는데 기억하고도 남았슬듯 하다.
아래에서 장원급제시 그가 지었다는  詩를 보면 더욱 혼돈스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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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 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신하라고 불려 오던 너 김익순은 듣거라                                曰爾世臣金益淳 (왈이세신김익순)
정공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鄭公不過卿大夫 (정공불과경대부)
너는 적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 릉(李陵) 같은 놈이요            將軍桃李陵西落 (장군도이릉서락)
정 시의 공명은 송나라의 악비(岳飛)처럼 길이 빛나리로다.      烈士功名圖未高 (열사공명도미고)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詩人到此亦慷慨 (시인도차역강개)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撫劍悲歌秋水  (무검비가추수사)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이기에                  宣川自古大將邑 (선천자고대장읍)
가산보다도 의를 앞서 가며 지켜야 할 곳이 아니었더냐            北諸嘉山先守義 (북제가산선수의)

두 사람은 다 같은 조정의 신하였는데                            淸朝共作一王臣 (청조공작일왕신)
죽어서야 할 곳에서 어찌 두 마음을 먹었더란 말이냐              死地寧爲二心子 (사지영위이심자)
태평 성대와 다름없던 신미년 그 해에                                    升平日月歲辛未 (승평일월세신미)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                        風雨西關何變有 (풍우서관하변유)

주 나라를 존중하려고 충신 노중련이 나왔고,                          尊周孰非魯仲連 (존주숙비노중련)
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제갈량이 나왔듯이                            輔漢人多諸募亮 (보한인다제모양)
우리나라에도 만고의 충신 정가산이 나와                              同朝寯臣鄭忠臣 (동조준신정충신)
풍진을 맨손으로 막아 내려다 죽지 않았더냐                          抵掌風塵立節死 (저장풍진립절사)

전사한 충신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 갈 것이니                          嘉陸老吏揭名族 (가륙노리게명족)
그 이름은 가을 하늘에 태양처럼 빛날 것이요,                        生色秋天白日下 (생색추천백일하)
혼백은 남묘로 돌아가 악비와 같이 살게 될 것이고                  魂歸南畝件岳飛 (혼귀남무건악비)
뼈는 서산에 묻혀 백이 숙제와 이웃하게 될 것이로다.              骨埋西山傍伯夷 (골매서산방백이)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 오기에                              西來消息慨然多 (서래소식개연다)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問是誰家食綠客 (문시수가식록객)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家聲壯洞甲族金 (가성장동갑족김)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淳)자 돌림이 아니더냐.                名字長安行列淳 (명자장안행열순)

가문이 훌륭하여 성은도 두터웠을 것이니                              家門如許聖恩重 (가문여허성은중)
백만 대적 앞에서도 의를 굽히지 않았어야 할 것을                  百萬兵前義不下 (백만병전의불하)
청천강물에 고이 씻긴 병마는 어디다 두고                            淸川江水洗兵波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에 간직했던 궁시(弓矢)는 어떻게 했단 말이냐.              鐵甕山樹掛弓枝 (철옹산수괘궁지)

임금님 앞에 꿇어 엎드리던 바로 그 무릎으로                        吾王庭下進退背 (오왕정하진퇴배)
서북 흉적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니                                背向西域凶賊股 (배향서역흉적고)
너는 죽어 황촌에도 못 갈 놈이라                                        魂飛莫向九泉去 (혼비막향구천거)
저승에는 선대왕이 계실 것이니 말이다.                                地下猶存先代王 (지하유존선대왕)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忘君是日又忘親 (망군시일우망친)
한 번 죽어서는 너무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一死猶輕萬死宜 (일사유경만사의)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春秋筆法爾知否 (춘추필법지부)
치욕적인 이 사실은 역사에 남겨 길이 전해야 하리라.              此事流傳東國史 (차사유전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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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詩는 김삿갓이 장원급제시에 쓴 詩가 아니라는 생각에 검색을 했더니 아래의 글이 있다.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디스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탄김익순죄통우천 논정가산충절사)'였다.
김삿갓을 빗대어 조부까지 비방하는 詩는 나의 생각이 딱 맞아 떨어진 詩이다.

진위를 가리기 이전에 가능성은 있는 경우의 글 아닌가?

 김삿갓은 역모에 가담한 후손인데 죽이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다니면서 양반들을 힐난하는 詩나 쓰는, 그래서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안동 김씨라...이를 바라보는 양반들의 시선은 곱지 않을듯도 하다,

위의 인용 설명에서 노진이란 시인이 김삿갓을 평안도에서 쫒아 낼라고 이런 詩를 썼다 하는데,,,
노진이란 시인을 옹졸한 인간으로 표현하는 ...어느 분인지 생각 자체가 우습네요.
최소한 글을 쓴다면 그 사람과 마주보고 대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가 요구하는것이 무엇인지 파악들 하고 상대 인격을 모독하지 않게 써야 할 것일텐데..노진이 살아있다면 내가 그리 옹졸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래에서 마찬가지로  김삿갓이 지금 이 시를 자기가 쓴 것이라고 본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런일을 영월이 자행하며 김삿갓 문화를 이뤘다고 자찬한다면,,,김삿갓은 그자리에서 주저없이 세상에 제일 무식한 짓거리란 詩를 한 수 읊을 일이로다.

노진이란 시인은 김삿갓이 그의 조상을 욕되게 하는 묘한 시를 써서 역 풍자를 하여 선친도 못나고 손자도 잘못했다는 조롱의 詩로, 또한 세도의 안동김씨들을도 욕을 하자는 의도는 아니었던가??
 
이렇게 김삿갓에게 야멸찬 야유를 퍼 붓는 詩를 가지고 김삿갓이 스스로 썼다고 잘못판단하는 것은 김삿갓에게 멍애를 씌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고, 노진이라는 시인이 바라본다면 참으로 통쾌할 일일듯 하다.
(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이야기이지만,,,)
그럼 영월은 김삿갓에게 조부를 욕했다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공하여 김삿갓에게 누명을 씌워 포장하는 영월의 문화는 가증스러워 질 것이다.
다른 기록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의 친가 3대+외조부까지 조상 4대의 이름을 답안지에 모두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랑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말이 우스운 것이지 김삿갓이 이래 지적 능력이 약한 사람이라고 무시하려는 것밖에는 더도 아닌 글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장원급제에 호패도 없이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가라는 나의 생각에대한  정답이 있다.
과거시험은 철두철미함이 내 머리보다 더 빡한듯,,,조상 3대의 이름을 명시해야 한다니...그래야 정상이다.
그런고로 본인 후세백작은 김삿갓이 과거 응시했다고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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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장원급제의 詩를 읽으며 상당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선 이 시의 한문실력의 깊이도 그려러니와 역사적 인식도 해박하다. 그가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정도에서 쓰기는 참으로 아까운 싯귀일텐데, 이 시는 20살에 쓴 것이고 홍경래란은 다섯살때이니 약 15년후에 쓰여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마도 노진이란 시인이 썼다면 김삿갓이란 이름이 전국에 떠 오른 이후일 것이다.

그간 그는 첩첩산중에 숨어살며 학자도 아닌 젊은이가 무엇를 보고 이런 이야기를 논할 수 있슬까 의문이라면...
그는 나이 스물에 어떻게 홍경래난시 죽은 정가산의 내용까지도 알 수 있었슬까?? 그가 이정도로 역사를 꿰고  있었다면 자기가 살던곳은 망각했슬까??

또한, 위 시에서 장동김씨는 서울 장동에 오래 거주한 안동김씨이다.
장동김씨라는 족보도 꿰면서, 그것이 자기의 족보인데, 자기의 족보는 모른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슬까??
보통 사람들은 대게 글 배울때 자기 이름과 족보로 몇대 손 누구라고 배웠지 않은가??
인터넷에 떠도는 소설같은 픽션에 따르면 제사시에 그의 어머니는 지방에 부사 누구누구가 아니라 학생부군 신위나 처사 누구라 하였다. 하지만 안동김씨는 지방에 쓰여져야 할텐데...그러니 이러한 설명은 약으로 쓰지는 못한다.
안동김씨에서 장동김씨까지 세분된것도 알면서 이러한 시를 지었다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곤란한 점이다.

이렇게 의심을 만드니 이젠 과연 영월에서 백일장이고 향시가 열릴만한 크기의 지역이었슬까??
아마, 당시로 영월 읍내 주택은 약 200채를 넘기지 못할듯 할텐데 관내 타 지역인구 다 합해도 또한 여기서 노비를 뺀 일반 자녀만 추리면 몇 명될까?? 이렇게 과거를 본다면 대체 양반의 객체수는 몇 %일까??

그래서,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이든 향시를 치렀는지 역사적 사실의 원안을 찾아보니 찾아볼 수도 없었다.(외냐면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에,,,)

또한, 병연은 나이 20세에 장원급제 하였고 그후 장가를 들고 2년후에 22세에 결혼을 하고 이후 집을 나갔다가 4년후에 형의 사망설에 1년간 집에 들어와 1년남짓 살며 둘째인 익균을 낳게되고 첫째인 학균은 형인 병하에게 양자를 보내고 다시 가족과 이별을 하고 방랑길에 오르고, 차남 익균이 병연의 대를 잇게된다.

다시한번 짚어보면,,,
김삿갓은 나이 스물에 영월 향시에 장원하고 그날 저녁에 어머니로부터 조부가 처형되는 이야기를 듣고 방랑의 길을 떠난건 아니다. 2년후 22세때 결혼을 하고 단꿈에 빠져있슬때 그는 방랑을 시작한다.

그가 20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를 탄핵하고  조상을 욕되게하여 처자식을 뒤로하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하였다는데, 그의 詩들을 보면 상당한 두뇌에 예리한 감성으로 즉각적 반응을 나타내고 있지, 그가 진실로 조상을 욕했다고 2-3년 후에 반응을 나타낼 아둔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 詩가 본인것이 아닌점이 간파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왜 방랑을 하였슬까?? 후세백작의 추론으로 가상적 스토리를 만들어보면,,,
정약용이 귀양가며 그의 두 아들은 대역죄인의 아들이라 과거에 응시하질 못하기에 학유는 명의가 되어 아버지를 귀양보낸 사람들도 죽음에서 병을 고쳐주었는데, 정약용은 정적에게 너무 구차하게 도움을 청하지는 말라 하였으나 정약용의 해금엔 그들의 탄복으로 학유의 노력도 숨어 있었고, 학연은 선비로서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우리가 잘 아는 농가월령가의 지은이이다.

또한, 당시의 양반들은 오직 관직이 아니면 생업이 없다.
율곡이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님이 편찬아도 만족할만큼 차려주질 못하는데 그렇다고 장사를 할려하여도 양반의가문이라 장사를 하여 돈을 벌수도 없으니 아버님을 위해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급제하는길 밖에 없었다라고 편지를 썼다한다.

이렇듯, 김삿갓이 공부를 하는데, 대역죄인이란 사실에 호패들 들춰보이질 못하는 애로가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는 몰락한 양반의 가문이지만 농사짖고 살 마음적 여유도, 아니면 체질적 스타일도 아닌듯 하여, 화전민으로밭을 일궈 하루끼니 자족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보면서도 달리 도와줄바 모르고 급기야는 가문이 밥 먹여주는가라는등 가정적인 불화도 가상해보며, 그는 할수없이 갈곳도 없는 방랑의 길을 택했다면 인간적인 면모에 마음이 당길듯 하다.

그 이유를 꺼꾸로 본다면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평생 삿갓만 쓰고 방랑만 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것은 위 인용의 詩가 장원급제시 김삿갓이 쓴 것이 아니라 평안도의 노진이란 시인이 김삿갓을 질투하여 모함한 詩가 사실이라면 그는 왜 삿갓을 쓰고 방랑하였슬까??

그가 조부에게 끼친 과를 사죄하려고 방랑하였다면 그는 한 평생의 방랑도중 기생과 동거도 하였고, 세인의 모함도 받았는데 그것이 조부에게 진 죄를 사죄하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의 학문과 선비적 정신이 이미 화전민으로 살아가기엔 번민스러웠슬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방랑을 하기엔 선친으로 하여금 숙명적인 대 역죄인이라 임금에 신하된 도리로 죄의식에,,,그래서 태양을 가리고라도 그 어떤 구속도 없는 자연인으로 살아갈 것을 마음먹었던 것은 아닐까 가상해 본다.

역으로 이해해 본다면 장원급제 하던날 어머니에게서 조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길로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나갔어야 도리인데 그 2년후에 방랑의 길을 택했고, 또한 대역죄인으로 전국을 떠 도는 것도 참된 도리는 아니지만 조부에 사죄를 위해 살아있는 처, 자식을 버려야 했슬것도 인간적 도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김삿갓은 환경의 어려움을 종교적 귀의로 변신을 꾀하진 않았다.

탄허스님은 한문을 배우러 당시 상원사의 한암스님을 찾아뵙고 도교를 사사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보다 일엽스님은 당시 이화여전에 학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시인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건만 그는 인간적 고뇌에 수덕사에 만공선사를 찾아뵙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삭발하고 불법을 받아 스님이 되었다.

어찌보면 김삿갓도 그의 핸디캡과 환경의 제약이 있는 현실을 훌쩍 털어버리기엔 불교로 귀의가 자연스러웠겠으나 그는 끝내 이 세상의 미련을 떨쳐버리지않고 방랑으로 길에서 객사할때까지 많은 고생과 많은 수모를 겪으면서 대역죄인이란 현실을 버리지 않은 미련에 마음이 당기는 것이다.

길따라 세월따라 갈곳도 없으면서 방랑을 하다 죽음을 객사로 맞이한다면 아마 이는 쉬운 이야기는 아닐진데,,
어찌 마음이 않갈 사람 있으리오만 또한 그는 방랑을 하며 양반의 불의를 질타하고 세월에 역으로 흐르는 자들도 꾸짖는 이후 그의 명판은 전국에 퍼져 고종도 김삿갓을 알게되고 그의 내력과 詩를 재미있게 듣고는 그의 손자벌인 스님을 불러서 대역죄인의 죄를 복권을 해주었다.

아마도 위에서 이야기한 정약용의 아들이 정적의 죽음도 살려주듯이. 김삿갓의 양반을 질타하고 모든 사람들에 추앙을 받는 일이 이렇게 왕이 감동하고 그는 죽었어도 가문의 죄를 씻겨준듯하다.

서양에선 문인에 화가, 음악가가 구분되건만 조선시대엔 이들은 잡과이고 양반이 아니다.
그러나 문인은 양반들이 하지만 직업적이지 못해 고산 윤선도나 정약용처럼 학문을 대하는것은 대부분 귀양지 문학이다.
이렇듯 김삿갓도 방랑이라는 자유로움에 마음껏 詩를 읊는데, 그의  詩는 당시, 선비나 시인들은 운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지고 또 화조월석이나 음풍농월만 일삼는 한시, 그래야만 시의 격이 높고 품위가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정형을 깨고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이 되었으며, 한시의 정형을 깨부순것은 미술로 이야기하면 앙뎅팡당의 시인이다.

美의 범위가 아름다움만이 아닌  더러운것, 뒤틀린것, 아니꼬운것들에대한 속어, 비어로 풍자와 해학등을 풀어나가며,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즉, 개탄, 저주와 조소,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畵的) 양식속에 美란 醜함도 美의 일부분이란 개념은 아마도 서양 사조에서 나타나는것보다 100년은 먼저 김삿갓이 이룩해 놓은 예술분야인듯 하다.

그의 기지(奇智)와 풍자와 해학과 시재(詩才)가 천재적이어서 그의 발자취가 머무른 곳마다 그의 익살맞고 재미있는 詩가 구전되어 남아있다 한다.
그는 스스로의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갈등과  양반들의 횡포에 대한 풍자, 이것은 멀리서보면 안동김씨의 세도의 부조리를 질타하는 또 한사람의 안동김씨의 인상은 아니었던가??

또한 민중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가진 전국적인 인물로 흔히 김삿갓하면 방랑과 풍류시인만을 연상하는데 그에 못지않게 그는 과객이었다.
마이스터(Mister-장인)라는 단어는 중세 서양에서 국권보다 교권이 더 우위일때 교황도 감히 함부러 못대하는 사람을 일컷는다.

미켈란젤로는 인류 최대의 걸작이라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란 천정화에서 예수도 누드로 그리는데 이에 간섭이 많은 담당 추기경은 지옥의 왕이자 심판관인 미노스의 얼굴에 비아지오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뱀으로 칭칭감기고도 생식기는 뱀이 물고있는 자세다.
이 그림을 수정해 달라는 청원을 받은 교황 바오르 3세는 난 천국가 그 중간지점 박에는 영향권이 없다, 지옥은 내 관할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천지창조를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관람한다. 물론 최대의 마이스터는 레오나드 다빈치이다.

서양에 이러한 특수적인 개념이 존재했다면 조선사회에서는 과객제도라는 특이한 문화가 있었다.
과객이란 문사(文士) 거지란 뜻이다. 방랑하던 과객은 어느 양반집 사랑방에 들어가서 "이리오너라" 하고 소리지르면 주인이 출타중이라도 상관없이 조그만 주안상이 먼저 나오고 주인은 돌아오는대로 사랑방에 들어와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이때 "이토정"이오 하면 주인은 그가 정말 이토정인지 아니면 학식풍부한 과객인지 탐색을 하고 주인이 무릎을 꿇어 에우하면 과객은 몇달 몇일이라도 그 집에 머물면서 아이들의 훈장도 하고 집안의 노인들에게 시조, 고사, 야담, 풍수, 풍월등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로 밤을 달구워 준다.

그에 대표적 인물로 군수도 싫어 그만둔 토정선생, 신숙주의 라이벌로 우리나라 최고의 신동이라 불리던 김시습,천하의 한량이고 기인이며 풍류시인인 임백호 그는“세상은 너무 추하지만 시가(詩歌)와 미녀(美女)는 사랑할만하다.”며 자유 연애론도 주장한 과객으로 오락도 흔치않던 그 옛날에 그를 맞이하는 양반집 사랑방은 그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재미있었슬까??

이러한 과객제도가 있었기에 김삿갓의 방랑생활이 가능하였겠지만..김삿갓도 전국에 이름이 날리어 과객으로 대접을 받지만 또한 그는 양반을 호통하는 詩로 또한 쇤밥을 얻어먹기도 하지만 서민들에게서도 대접을 받는 전국민이 대우하는 최고의 과객은 아닐까??
( 양반의 사랑방엔 판소리나 창가등의 소리꾼이나 씨름장사,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등도 한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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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의문 한 점은??
아래 사진은 고향 후배님 "마운틴"블로그에서 스크랩 금지인데도 실례를 하였다.
평창읍 천동리 (고) 강병준님의 집터 주변 도마치에 있는 김삿갓 차남 김익균의 묘터 지금은 이장 한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삿갓의 대를 잇는 둘째아들(첫째 학균은 김삿갓이 형 병하에게 양자를 보냄)은 영월 하동의 와석리에서 언재부터인가 평창읍 천동리로 이사하여 도마치로 들어가는 초입에 살았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여기에 묘를 쓴 흔적도 있다.

그는 여기에 살면서 아바지 김삿갓을 찾으러 대구근처의 경상도, 진주등 무수히 쫒아 다녔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변좀 보고온다고 하며 보리밭으로 통해서 도망가는등,, 결국엔 화순에서 죽은후 3년되어 영월 하동 와석리 산속의 생가 들어가는 입구에다 묘를 쓴 것이다.

그러면 그는 왜 평창 천동에 살면서 폐가가 된 와석리 입구에다 아버지 김삿갓 시신을 이장하였슬까?? 이점에도 의문은 가지만 본인은 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김삿갓은 22살에 결혼하고 그 이후 방랑하다 4년만에 들어와 병연을 낳고 다시 이별을 하여 방랑하다 57세에 하직하고 3년만에 이장하는데 그러면 익균의 나이는 서른 이전쯤에 아버지를 화순서 모셔서 이장 하였다.

그런데 언제 와석리에서 천동으로 이사했는지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기에 이는 주장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가 와석리에서 산속으로 1,8km들어가 살면서 화순서 천리길을 모셔와 와석리 입구에다 묘를 썼슬까??

그의 생가는 산속에 앞으로 보아도 코앞이 산이고 뒤로 돌아도 코밑이 산속인 곳에 숨어 살았다. 그리고 익균은 도마치로 이사하여서도 와석리처럼 비좁은 마치 실오라기같은 산속에 살았다.

도마치란 도말이란 끝부분이 말려있다란 뜻을 내포하는 의미하는 단어로 격음화 되어 도마치라 불리는데 단어 자체가 좁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도마치에서 조금만 나오면 1-20채정도의 집괴 넓은 들판의 천동이란 마을이 나온다.
익균이 와석리에서 천동 도마치리로 이사한것은 더 나아진 환경은 아니다. 똑같은 모양새의 실 오라기 산속이다. 그러면 그는 와석리에서 신변이 노출되고 무언가 쫒기어서 이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천동으로 이사하기전 외석리에 살면서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다가 지나다니는 행인들 보란듯이 묘를 썼단 말인가?? 그는 천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도마치 입구에 숨어 살았는데...그렇다고 천동으로 이사한 이후에 이장을 했다면 폐가가된 와석리에 묘를 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부분도 매끈하지는 못하기에 나에게는 의심의 대상체가 된 것이다.

현재의 김삿갓묘는 김삿갓의 묘는 양백(태백-소백)지간, 영월-영춘 어간에 있다'는 고문서 기록에 의거하여 1982년 향토사학자 박영국씨(작고)가 당시 영월 문화원장으로 72세의 고령의 나이에 이곳 생가를 답사하며 학계에 건의하여 학계의 인정으로 김삿갓 묘가 발견된 것이지 원래 후손이 모신것도 아니고 땅을 파본것도 아니며 그 진위와 상관없이 학계가 무엇으로 확증하여 남의 묘까지 인정해주는지는 알 수 없다.

이보다 약 5년쯤 전에 김삿갓 후손들은 무등산 잣고개에 "김립" 시비를 제작하였는데 최소한 직계 후손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 후손분들이 김삿갓의 묘는 어디인지 몰랐슬까?? 그래서 학계가 인정해준들 의심이 가지만 족보를 찾아보고 후손을 찾아아 물어보면 쉬울텐데...천동의 익균의 묘는 90년대에 이장되었다는데,,,그럼 이 후손분들이 익균의 아버지인 김삿갓의 묘는 모른다면 그도 어패이리라.
그러기에 묘의 위치에 관한 정답은 후손들에게서 충분히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는 땅 안파보고도  알수있는데 학계에선 정답을 발할수도 있고 오답을 낼 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모른다면 영월은 현 김삿갓묘에 DNA 검사라도 하여 확신을 심어줄 용기는 없슬까?? 설령 그렇게까지 중요한것은 아니니라 생각하지만 원론은 그렇다.

여기서 한가지 더하면... 천동에 익균의 묘소에서 보이는 멀찌기에 또 한기의 묘가 있는데 이 묘는 익균의 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다. 만약 이 묘가 익균의 묘를 이장할때 같이 이장되었다면 이 묘는 아버지 김삿갓이나 어머니 묘임에 분명한것이다. 이것이 천동에 남아잇는 미스테리인 것이다.

김삿갓의 이해에 대한 나의 의문은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있으면 이를 이해하고 보완하는게 더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하며, 또한 잃어버린 평창의 이야기들중에 한 부분일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의문하여 본다.

하지만 이 의문의 정답을  난고 김삿갓의 후손분들은 알고 있슬 것이다.
후손분들이 천동리의 난고의 아들인 익균의 묘를 어디론가 이장해간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8-90년대에 이장해간 후손들은 아마 익균의 5대손자들로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그 유명한 김삿갓의 묘에는 관심이 없었슬까??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난고 김삿갓의 묘도 정확히 알고 있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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