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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國舅祠宇)에 대한 나의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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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벡작 작성일16-02-05 22:09 조회5,340회 댓글4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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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國舅祠宇)에 대한 나의 생각은??>

후세백작 2016.01.30 19:59
국구란 보통은 왕의 장인인 부원군에게 붙여지는 작호로 평창의 국구사우는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평창의 국구사우란 평창이씨 이 광의 5 대손 이 숙의 딸이 목조 비이며 목조는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이며 그의 부인이 평창이씨 효공왕후이다. 이로서 이 숙은 노산 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이씨 조선의 시조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비가 평창이씨였기에 평창은 군(郡)으로 승격하여 현감보다 상위의 군수가 재임하며, 정조실록엔 이숙과 그의 처 정씨부인의 묘가 평창에 있어 이성계의 명으로 호장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이후에도 호장에의해 제례를 행하여 과거 위화도 회군 이후 흩어진 평창이씨를 규합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역사유적이다.

평창이씨의 시조는 고려 명종(1150년경) 평창출신 이광이 과거에 합격하고 정 1품이되자 백오君으로 봉군되며 시작된다.
이씨 조선이 건국하며 이광의 5세손 이숙의 딸이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의 목조비 효공왕후로 봉해 추증되었다.
이안사는 전주에 임명되어온 지방관과 갈등에 외가인 삼척과 처가인 평창이씨의 도움등으로 강원도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에도 피신하여 함경도로 올라가게 터전을 잡지만,,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시 이숙의 7세손 이천기는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는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 장수를 따라 고려에 충신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천기가 명에 사신으로 갔슬때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다.

이 장에서 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이성계는 당시 왜구들이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한번에 수백처씩 도적질 하러 들어오는데 이성게는 여섯번정도 패주시키는데..
또한 후실 강씨부인 아버지인 장인은 고려말 장관급으로 당시 여말 공민왕의 파행등에 불만인 문인들의 정세, 정보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일반적으로 보기에 회군은 실패가 될 수 있는 여론도 지배적이었으리라
80년대에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무관과 정보라인등,,,여기서 나온 말인듯하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하자 이원계는 자살로 충절하고 그를 따르던 이하 장수들은 죽여버렸다. 이후 이천기는 사신에서 돌아온다, 이래서 평창이씨의 원 장손은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이성계는 그를 부르지만 이천기는 장단으로 숨어버린다.
(아마, 장단은 지명이 아닌 깊은 산속을 의미하는듯)

평창 이씨의 종손이 숨고 평창이씨들은 멸문하게 될 지경으로 흩어지는데...
이때 이성계는 그의 상 할머니격인 고조 이안사의 부인인 효공왕후의 아버지인 노산부원군 이숙과 그의 부인 정씨의 묘가 평창에 있어서 이성계는 이를 지방 호장에게 제례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아마도 이숙은 사위와 딸인 이안사와 목조비의 강원도 이주에 상당한 보살핌을 준듯하다.
고려의 권문세도가로, 고려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키면서도 조선의 대접을 받은 가문이 평창이씨이다.

효공왕후 어머니 정씨부인의 묘가 郡 서쪽 4리쯤 (현 유동)에 있다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효종때 국구사우를 정비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왜놈들이 철거 하였다.

이성계는 당시 수백척의 왜구떼들을 출현을 방어한 장수로서, 한번은 적장의 왼눈에 화살을 꼽아 돌아가게하는 방방곡곡에 그 이름이 맹위를 떨쳤으니, 아마도 이성계는 왜구들에게 징기스칸처럼 두려운 존재였고 후일에도 이를 경계나 하려는듯,,,

이상, 후세백작이 이해하는 평창이씨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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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15일 평창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열린 가운데 박도식 강릉원주대 교수와 장정룡 강릉원주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였으며, 이어 이경식 평창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과 윤일구 평창군 학예연구사 등이 참여 토론을 벌이며 국구사우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한다.

평창의 국구사우의 특이점은 조선시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예를 지낸 역사를 가지며 일제 강점기에 사우가 철거되고 지금 그를 재 조명해보는데, 사우의 위치나 사료에 꼭 연연하기 보다는 지금으로선 이전이라 생각하며 옛 군수사택 앞의 고목 아래쯤, 양택지 내에서도 음택같은 그곳이면 적당하리란 생각과 그 일대를 조그만 공원화 함도 역사를 기릴 수 있고, 또한 평창의 주인격인 평창 이씨 후손들에게도 의미가 있으며, 그곳에 위치한다면 노산아래라 노산이란 단어적 의미도 가릴 수 있어 좋치 않을까 생각한다.

이 점도, 잘 검증되고 정비된 문화로 맥을 이어야 할 것이다.

<후세백작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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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목조비 효공왕후의 어머니 묘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창평 4리쯤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동이 아닌 지금의 하리 산 9-49이란 추정의 설도 있습니다.
봉분은 삭아 찾을수야 없다면 최소한 세월이 흐르고 언제라도 블랙박스보다 더 단단한
비문은 태양을 그리워하고 있겠지요.

태조가 3명절때마다 永世토록 지내게 하였는데 정조는 2번만 지낸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정비하여 승지로 하여금 禮를 지내게 하였다.
1788년(正祖 12) 10월에 江原道觀察使 李度默이 임금의 命에 依하여 이 祠宇記를
쓴다고 밝힌 기록에 있다.
국구사우 헌액의 탁본이 보존되는한 최소한 정조때 국구사우를 정비할때 이 정씨 부인의
묘와 비석도 존재하였으리라. 
 
6,25때 군인의 명령으로 민간인이 전소시킨 월정사는 당우 22채 모두 전소하고 모두 소실하였지만
팔각구층 석탑은 세월속에 화마에도 건재하듯 그 이름석자의 돌산군 부인 정씨의 비문은 언제라도
다시 태양이 비출날을 기다려 봅니다.

평창문화원님의 댓글

평창문화원 작성일

후세백작님 평창문학 카페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시는 모습 뵈었는데 이곳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습니다.
자주 오셔서 좋은 역사의 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본문중에 쓴다는것중 하나 잊은게 있습니다.
 니체는 이런말을 헸지요 "산책을 하지 않는 글은 죽은 글이라고"'
저는 일전 이글을 쓸때 한강을 걸으며 나의 통창생들중 평창 이씨들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읍네에는 전주 이씨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연부락인 여만리에 10명, 종부에 예닐곱명 등
이렇게 따지면 평창인구중 단일 세족으로 10~20%를 차지하는 이구분포를 가지는듯 하다.

이느 가히 어느 집성촌의 범위를 넘어서는 평창의 터줏대감이라 지칭해도 무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평창있들의 파워를 살려서 극구사우의 정탑 찾기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좋을듯 하다.
극구사우는 단명적인 건축자재들이지만 그 탁본이 있고 또한 아마도 정씨부인의 묘에는 최소한의
비석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평창에 남아 있기에 언제라도 찾길 희망한다.

이 "평창의 극구사우"란 왕의 장읹도 아닌 이성계 5대조 추존 효공왕후의 어머나의 묘에 제사를 지니게끔 명한 이성계는...
아마도 고조 이안사와 효공왕후가 장인인 이숫과 정씨부인에 아마도 생사를 넘는 깊은 헌심의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니 이성게도 이러한 베품을 하는것이 아닌지??
특이한 역사에 저로서는 극구사위의 위치 터가 중요한게 아니고 이로서 특별히 더 군민 화합의 장이 되는것이리 하여도 그보다 더 가치있는것은  이조실록 이성계 편에서 이런 글귀라도 찾아낸다면 참으로 가치잇고 멋진 일일듯 합니다.
 평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국구사우 터의 확인 키 워드가 저의 블로그에 검색되는데...
국구사우터에 대한 이야기는 엄기종님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http://cafe.daum.net/eomgijong/DsS7/62

국구사우터는 노산의 동편에 당초 지었다가 섯가래가 썩고 오래되어서 창평현의 앞으로 옮겨졌으며 옛지도에도 현의 앞에 표시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노산의 비술나무 보호수 부근에 있는 서낭당터는 확인한바 있고, 극락사 옆의 사당도 듣기만 했고, 지금 등기소 자리에 있던 옛건물을 뜯어서 지금 시루목 호남주유소 뒷편으로 옮겨서 옛 소방대로 썼다는 건물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나중에 지은 국구사우터라면 그 옛건물이 옮겨진 상태로 있으니 그 건물모형을 그대로 다시 노산에다 지으면 되니 매우 다행한 일이죠. 저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옛날 현의 앞이라면 등기소 쯤으로 생각되고, 등기소를 짓기 위하여 거기에 있던 옛건물이 옮겨진 것은 해방되고 실행하였으므로 그 기록이 어딘가 있을 것으로 생각 되고, 그 내용을 아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윗 글이 그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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