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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당시 평창전사(戰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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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2-23 12:28 조회6,46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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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번대의 각 부대별 군기>
1번기--- 모리요시나리군기
규수 부젠국 다이묘로 임란당시 직속부대 2,000명을끌고 옴.
2번기---타카하시 모토타네 군기로 600명병사를 데려옴.
3번기---시마즈요시히로 군기.


< 이 프레임은 사진이 제 칸에 못 들어가서 위에 올립니다.
본 프레임은  글씨 크기도 일괄적이며 글체의 폰트나 칼라도 선택이 없이 일괄적이라 아래의 글을 빠르게 구분하여 이해하기 좀 힘들것 입니다.
디지탈화 시대에 좀 더 옵션이 다양한 프레임을 했으면 하는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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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당시 평창전사(戰史)

                                                                                      후세백작 2014.10.02 01:50
<이 글을 게시함에는 420년전 임란당시 평창의 항쟁사에 관하여 대굴령을 넘어 진부로 왜구들이 쳐들어왔다는 등,,
함경도에 왕 세자를 잡으러 갔다가 중데장급의 모리부대가 후퇴하며 평창을 쳐들어 왔다는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기에 역사를 바로 정립하기이 이 글을 게시합니다>
                                                                           
평창 임란사의 구체성 이전에 잠시 임진왜란의 개괄적 언급을 하면, 1592년 임진란때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조선 정벌군은 9번대까지의 본대와 예비대, 그리고 기타 부대를 합해 28만 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의 편제를 아래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번대 : 고니시 유키나가 18,7000명.... 평안도 장악 계획.
2번대 : 가토 기요마사 22,800명  .....  함경도      〃
3번대 : 구로다 나가마사 11,000명 ....  평안도      〃
4번대 : 모리 요시나리 14,000명  ,,,,,  강원도      〃
5번대 : 후쿠시마 마사노리 12,400명,,, 충청도      〃
6번대 : 하치스카 이에마사 12,700명.... 전라도      〃
7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700명....경상도
8번대 : 모리 데루모토 30,000명    ,,,,,,,,경기도
9번대 : 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경상도    〃
여기까지가 본대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예비대.

10번대 : 난쵸 모토키요 17,500명
11번대 : 아사노 나가요시 24,960명
12번대 : 마에다 도시이에 10,000명
13번대 : 오카모토 시게야마 6,490명
14번대 : 하시바 히데카츠 13,750명
15번대 : 히데노 다카아키 4,100명
16번대 : 도쿠카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12,050명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계획에 따라 총 16만 3천 2백여명이 조선을 쳐들어온다.
조선을 점령후 조선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고 예비대를 합쳐 중국을 쳐 들어가 북영은 천왕에게 주고 강남쪽의 닝보는 도꾸까와 자신이 통치하려는 (대륙경략 계획 25조)를 작성해 놓기도 하였는데, 이는 도요토미는 세계정세에도 어두웠고 자기나라는 비워 두고라도 예비대까지 25만여 명의 병력으로 중국을 전부 말아 먹겠다는 야망은 조조의 백만대군의 삼국지도 못 읽어 본 사람 아닐까??

일본과 달리 한국과 중국은 중심이 되는 성을 함락한다고 전쟁이 끊나지 않는데, 이는 도요토미의 망상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591년 7월에 조선은 성절사로 김응남을 파견했지만, 조선이 알려주기도 전에 복건성의 무역상 진신이 장사차 오키나와에 들렀다가 전쟁 계획을 전해듣고는 즉시 복건성 순무 조참로에게 알렸고 그것은 바로 명 조정으로 들어갔다.

당시, 오키나와에 왕세자 상령은 아예 명의 조정에 일본의 은밀히 계획을 알렸고, 오키나와에 끌려와 한약방을 하고 있던 강서성 출신 허의후도 주균왕이라는 사람을 보내 알렸지요.(오키나와는 히데요시의 병력 모집에 응하지 않았음)

재미있는 것은 조선 조정은 일본이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를 치겠다는 것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으로 시간을 끌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치려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짙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대신들은 역으로 이런 생각도 못하는 주제들에 니라의 존폐의 위기에 별거로 시간을 다 끄는 ...

뒤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때도 명나라는 사실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은 고려, 고구려처럼 강군을 가지고 있던걸로 기억하기 때문에 불과 며칠만에 한양이 넘어 갔다는 이유로 원병하기 이전에 그 사실에 대한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답니다.
우리로선 사색 당파와 왕의 무능력이 주범이었다.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의 강원도 大回戰>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가 강원도 평정의 길에 우선 평창 전사에 따라붙는 미사구 중에 왕세자를 잡으러 함경도에서 우회하였다는 것과 모리부대가 4천 또는 1만5천의 병력이나 병력이 평창을 쳐들어온 것이 아니기에 부가적 설명부터 합니다. 

가토 기요사마(가등청정)는 1592년 임진란때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조선 정벌군 2번대 선봉장으로 4월 17일에 부산에 상륙, 5월 13일에 서울을 입성하여 함경도 해정창(海汀創 전투에서 한극성이 이끄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평정하였다.
이후 국경인(鞠景仁)등 현지 조선인에 의해 생포되어 있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삼았다.

이어서, 가토는 조선의 국경 두만을 넘어 만주로 침공 하였지만 그들의 주 루트가 아니고 노획물이 적어 다시금 함경도로 후퇴하였다가 명군의 출병에 경기도로 후퇴하란 명으로 함경도를 철수 하였다.
그러기에 모리부대는 함경도에 왕세자를 잡으러 갔다는 이야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왕 새자의 기록은 가토 기요사마의 함경도 전사에 자세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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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당시 강원도 상황으로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는 시마즈 가문 군대로 이 시마즈 가문 군대는 임란에 참전한 왜군 중 가장 악명 높은 군대이다.
이 부대는 임란 말기에는 7년 전쟁동안 가장 많은 문화재 약탈과 포로를 잡아갔고, 강원도에서 조선인 머리 70개, 코와 귀 1,300개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토요도미 히데요시에게 보내 충성을 과시한 일본의 따블빽들이다.

규수의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큐수의 통일의 목전에 도요토미의 중재를 거부하자 토요토미는 20만의 대 병력을 보내 큐수를 정복합니다
큐수는 싸우기 전에 항복하고,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

큐슈는 미국의 오하이오, 한국의 전라도처럼 변방이며, 그래서 그들은 유사 성격들을 보이는 특징도...
2 만의 군대로도 족할 전투에 무모하리만큼 20 만의 대군을 보내며 군 운용에 발전을 가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5 년후 20 만 대군을 보내 조선정벌을 나선다.

이에,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4번대의 시마즈 가문은 1만 4천 명의 군대를 조선징벌에 보내게 됩니다.
총 대장은 큐슈지방의 시마즈 가문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젠국의 다이묘가 된 도꾸가와의 가신 모리 요시나리이며 그는 자기의 병력 2,000명을 끌고 왔다.
(뷰젠국은 큐슈지방이 북쪽 고쿠라 도시지역으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은 원래, 이 고쿠라에 떨구려는 목표로 6시간이나 비행해 갔는데, 시계불량으로 3대의 편대가 흩어지고, 시계불량이 80%로 회항시 기름부족으로 원폭을 바다에 떨구려다 바다 건너편 섬의 나가사키에 조금 구름이 적게보여 조종사는 이곳에 투하하여 고쿠엔은 운 좋은 도시이다)

왜군 4번대는 한성에서 강원지역으로 진군을 하자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춘천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왜병이 김화에 출현했다는 소식에 병력 500명을 이끌고 김화에 도착하자 이 사실을 미리 안 왜구들은 매복하였다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원호의 목을 베어 김화 성문에 매달고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원호; 무관으로 선전관,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역임 , 왜구를 막지 못했다고 유배 후 석방되어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주 등지에서 전투함, 좌의정 추승)

왜군 4번대의 시미즈 군대는 간성(고성)을 경유하여 춘천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여기서 4번대 총대장 "모시 요리나리"의 제1대 (아래 군기 1번기)는 삼척을 지나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을 지나고 원주를 점령하게 된다.

당시 모리 요시나리의 직속부대 2,000명과 규슈의 중소 다이묘의 군사 1,000명을 포함하여 3,000명이 정선으로 들어가자 정선 현감은 전투도 아니 하고 그냥 항복하였다.

"호구록"엔 정선관리가 평창까지 끌려와 이번과 앞으로도 10월에도 두어 번 곡식을 공납하라는 강요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첩첩산중의 실오라기 같은 동네에서 항복하고 곡물 공납이나 성문화도 원색적이고 교양도없는 왜놈들의 질서는 참으로 문란이 도를 넘었슬 것이다.
(*호구록- 임란당시 권두문 군수가 직접 쓴 평창임란전사중 일부이다)

4번대의 1대 3,000명의 모리부대는 정선의 항복을 받고 성암령을 넘어 미탄에서 평창으로 접어들었다.
미탄 삼거리에서 첩경인 마차를 지나 영월로 가지 않고 평창을 경유, 영월로 들어가서 원주로 들어가게 된다.

미탄에서 평창으로 들어오기에 멧둔재를 넘어 윗 상리에서 삼방산 아래의 종부 음지말을 거쳐(평창전투 첫날 관군은 종부에서 왜군 한 명을 사살한 쾌거를 이룬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군은 미탄서 영월로 빠져 제천을 돌아 원주길이 가장 지름길이고 편한 길이었슬 텐데, 그들은 평창을 돌아서 영월로 간 것은, 미탄에서 영월을 거쳐 원주로 갈 경우 주천쯤에서 평창의 복병을 만날까봐 평창을 먼져 거친 것이라면 정선의 항복때 이 산길의 길을 잘 아는 조력자들의 정보에 기인한 것이란 추정이다.

평창서 주천으로 가는길을 생각해 보면 미륵띵, 천동앞산 도로. 도돈의 옥녀봉 아래의 도로등은 대군이 지날 길이 없었슬 것이며 종부서 강을 건너 응암서 마지로 강을 건너 또 도돈 진바리 강을 돌아 건너고 꽃동네이고 다시 강을 건너고 대하리에서 또 다시 강을 건너 판운서 강을 건너도 험준한 산 허리를 올라야 주천 고갯길을 오를 수 있는 지형으로 지금의 도로가 아닌 당시 산길의 지형은 이렇게 힘들고 3천명의 대군이 가야할 도로가 못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영월-제천- 주천-원주길이 최소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최적의 도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왜구들은 원주 강원감영을 접수하기 이전에 김화-고성-강릉-삼척-정선-평창-영월로 한 바퀴 돌며 우회하며 주변부터 정복하는 전술을 택하였고 "호구록'에 의하면 그들은 평창에서 원주로 가는 빠른 길인 주천으로 접어들지 않고 영월로 돌아 영월군도 접수하고 갔다.
왜구들은 종부를 지나 여울을 건너 약수에 본영을 자리 잡았다(호구록에서 권 군수는 포로로 잡혀 약수 본영에 임시감옥에 투옥 되었다)

평창현감 권두문이 겪은 난중일기 "호구일록"<虎口錄>에 기준하여 아래는 당시의 이야기들의 이해를 서술해본다

<호구록 ; 임란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일기체 형식의 임란 당사자의 기록임>
호구록 1) 8/ 7일,,,영동의 왜적들이 모두 대관령을 넘으며, 이날밤을 타고 왜적의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들어왔다.
                        ( 이곳 평창을 다녀갔다란 기록에서 아마 권군수의 부임 몇 개월째라 지리에 혼동으로 대관령을
                        넘었단 표현은 오류인데, 당시 평창에서의 이해로는왜구가 대관령을 넘었으리란 판단의 오류인듯,,,
                        하지만 모리의 기록엔 삼척 백봉령을 넘었다)
              8/ 9일,,,항복을 권하는 倭書를 가지고 온 자의 목을 베고 우리 평창은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호구록 2) 8/10일,,연 나흘간에 이어서 왜적은 모두 도착한 듯, 약수에 본영의 진을 치고 정동굴에 피난을 한 관군민이
                          왜적에 적발 되었다.
호구록 3) 8/11일,,응암굴은 왜적에 포위되어 군수는 체포되고 강소사는 왜적에 체포시 응암굴 아래 천인절벽에 투신
                        자결 하였다. 군수 일행은 약수 임시감영에 투옥됨.
호구록4) 이 장에서는 타이틀 표지에 임란당시에 함경도에서 왕 세자를 잡아 한양으로 보낸 후 원주 감영을 접수하러
                        간 설명은 오류로 왕 세자를 잡으로 함경도로 간 부대는 2번대 가토 기요사마의 부대임을 이미 밝혔다.
호구록 6) 8/16일,,왜적이 영월로 가면서 군수일행도 영월로 압송되었다.
호구록 7) 8/19일,,17, 18일에 영월사람들이 투옥되며, 19일엔 고씨굴에 피난한 고종원 형제도 체포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 장에서든 고종경 어른이 영월서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백의 명에 미쳐 따르지 못한 죄명으로
                        평창으로 압송되어 권 군수는 명에 의해 형 횡(刑行)하는 기록이 정확히 서술되어 있다.
호구록 9) 8/23일,,자정쯤 부대는 이동하여 북천(주천인 듯)에 이르러 다른 진영과 합류하여 원주로 이동하였다.
                          (이날의 호구록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제천과 주천의 갈림길에서 길가의 촌가에서 재물을 뒤지느라 방방이 뒤지는 것도 보았고, 그리고
                        간혹 여자도 태우고 가는 자도 있었다.
                        또한 큰 짐이나 작은 짐을 지고 가는 자는 반 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놈 모양을 하고 있슬뿐이다.
                        웃고 떠들고 하는 말이 우리말이다.
                        깃발을 크게 벌리고 행군하는 걸 보면 마치 장수가 행군하는것 같다 . 그러나 허세다.
                        괴수는 보통 옷을 입고 말만 타고 대열 중간쯤에 섞여서 간다.
                      *그 옛날에도 일신의 호강을 위한 앞잡이 부역꾼들의 설명이다*
호구록10) 8/24일...신림을 지나 가리 현에 들어가니 10명 정도의 머리를 잘라서 바위 위에다 올려놓은게 보였다.
              8/25일.. (*주;원주 감영에서) 통역 왜인이 와서 어린애의 목에 창을 들여대고 목사(주;원주목사 김제갑 옹은
                          어디에 있느냐고 다그치니 한 노인이 영원성(*주;치악산 정상 아래의 성)으로 갔다 말한다.
              8/26일,, 어제 왜병들이 영원으로 갔는데 오전에 왜병 한사람이 영원에서 가져온 머리 하나를 보이며 누구냐
                          묻는다. 어느 노파가 살며시 말하길 원주목사 김제갑옹의 아드님이란다.
                          (*주: 영원산성에서 김제갑 목사와 그의 아들은 목이 베어지고 모리 부대인 4번대 1대의 3,000명의
                          왜적에 의해 군, 관민 4,000명은 참패를 당하고 강원감영 원주도 왜구의 손에 들어갔다.)
호구록 13) 9/2일... 권군수 일행 3명은 깊은 밤 폭우속에 왜병의 감옥을 탈출한다.

이로써, 권 군수의 8/7일부터 9/13일까지의 일기체 형식의 기록인 "호구록"은 16장과 완결편으로 끝을 맺는다.

420 여 년 전의 글이지만 이를 읽어내려 가면서 마치 영사기록을 보듯 당시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서로 그의 기억과
정확하고 자세한 기록에 감탄사를 자아내며 또한 기승전결이 잘 갖춰진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이 기록이다.

여기서 기승전결이라 함은 왜구가 평창으로 진격하며 응암굴에서 포로가 되어 원주까지 끌려가며 겪는 풍상과 원주 빙허루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과정속에 주천에서 산간오지인 입탄으로 돌아 다시 평창 땅을 밟으며 정동과 공기. 도마치를 지났어야 할 외길의 첩첩산중으로 영월 상동에서 장남과 동생을 만나 깊은밤에 고향 집으로 찾아가는 ...

이 기록을 조금 간추려 보았는데, 물론 영원산성의 기록은 평창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지만  이 호구록에 나의 이해를 피력해 본다면..

* 8/7일 정선서 첨병 왜적들이 평창으로 들어오고 8/8일엔 주력부대들이 약수와 천동일대에 집결하여 군장을 푼후 주변에 먹거리나 부녀자 납치등을 목적으로 8/9일 인근 천동 강건너 응암리에서 응암굴에 피신할 때 풀숲에 감춘 깃발을 확인하고 주변을 검색하던 왜적들에게 피난 굴은 노출되고 다음날인 8/10일 피난굴은 공격당하였으며, 권 군수 일행은 체포 되었다.

호구록내에 권 군수는 강녀에게 동촌으로 (*주: 이 동촌에 대해서 평창인들의 논란이,,, 엄기종 님은 당시에 평창군 동면은 현 정선 신동읍이며 동촌의 요새는 미탄 백룡동굴이라는 언급이 맞는 듯 합니다)

피난을 권유하자 장수들은 군수가 그곳으로 갈 필요없이 난공불락의 요새굴인 응암굴로 가기를 직언하였다.
동촌이 어디인지 견해 차이는 있지만 권 군수는 고향 집 가기가 수월하고 가깝다는 표현인데..

"응암지"에서 동촌은 권 군수가 고향 영주로 가기 가깝고, 또한 정선과 태백, 삼척으로 접했다고 표현되 있으며,1906년 행정개편 이전에 지금의 정선군 신동읍이 평창군 동면이었으며, 지금의 미탄면은 그 당시에는 마을 형성이 않 되었던듯,아뭏튼 동쪽으로 동촌이라면 멧둔재를 넘어 미탄뿐인데, 미탄은 청옥산 아니면 백룡동굴뿐이라.

그래서 군민등 100여명이 피란하고 숨을 수 있는 곳은 동촌 건너기 전의(*지금의 동강)의 백룡동굴이 천연요새로 엄기종님의 견지인 백룡동굴 피난설을 무조건 부정만은 할 수 없는 것이라..

백룡동굴은 예부터 굴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찾기도 어렵고 강을 건너며 공격을 가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피난처인 것이다.

만약, 동쪽으로 피난가서 왜구를 등뒤로 따 돌렸었다면 그들을 원주 도영을 정복하기 위해 찾기위한 시간은 없었던 듯하여 평창도 노역자. 곡물, 부녀자의 횡포는 있었슬 듯하다.

임란당시 노산성 전투를 이야기 하는데, 위 평창 임란사를 보면 노성산에서나 장기적 전투도 없었다, 왜구 수백명을 사살한 이야기도 사실이 아닌듯 하다.
또한, 노산성 뒤 강건너 여만리 여울의 뙈담이라는 두 개의 돌무더기는 요새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다.
왜담이 아닌 뙤담 즉 뙈놈이라면 오랑캐라,,, 고려때 70년간 이 땅을 밟은 몽골군에 항쟁 때 몽골군이 쌓았다는 추정도..
그러나 이 돌 무더기는 반대쪽에서도 노상산에 그대로 노출될 각도일텐데 은폐나 엄폐의 성을 쌓았다는 논리는 부정확한 뜻을 내포한다.

일단 이 방추형 돌무더기는 인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군사목적으로 부적격이라면 옛 선사인들의 강가에 무언가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선사시대의 어떠한 생활 패턴이 아닐까 하는..

*호구록 속에 왜의 대화 내용중 영월서 재천과 주천의 경계에서 길을 재촉하던 이유는 충청땅이기 때문이라던 글에서,.,
그러면  이 4번대는 오직, 강원땅만 정복하고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감사의 직책을 내정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수구의 방어자세를 갖추면 공격도 힘들어 질텐데 정선서 평창을 넘어오며 평창을 그냥 그대로 별 노력없이 정복하였다. 그것이 유사점이 위 영원산성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8/24일 선발대가 영원산성으로 찾아들고 25일엔 본대가 올라갔지만, 원주의 빙허루에선 적장들이 잡혀 온 포로들에게 김제갑 옹의 파악에 고문을 가한다.
그러면서 26일엔 김제갑 부자의 목이 박스에 실려 서울 본영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지는 듯 하다.
즉 영원성의 4천명의 병력은 25일 모리부대에 3천명중 원주 잔류 병력을 제외한 적군에게 전투 한번에 패하였다.

 또한 호구록엔 왜적들은 글을 모르는 상태가 대다수인듯 표현한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은 개인의 목숨을 넘어 국민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국가관과 임금의 신하로 행동 했다면, 이 시대에 왜넘들의 막부는 글보다 칼로 남의 목을 내려치고 약육으로 생존하는게 중요한 일이기에 글은 몰라도 된다. 이러한 무식한 군대가 전쟁초 하루만에 승리하는 점이다.

여만리 강물이 시루목에서 꺾어지는 50m 전쯤에 지금의 제방 안쪽 선쯤에 호박돌 무더기 두개가 있었다.
제법 높아서 그중 하나는 약 2층 높이인데 지금은 제방에 묻혔슬듯 한데.. 이곳이 언제 누가(아군,아니면 적군인지??) 무엇을 위해 쌓은 돌인지 알수가 없다.

 항간에는 임란때 왜적들이 노성산 요새에 대비한 성벽이란 설은 무의미하다.
위 평창 임란사를 보면 노성산에서나 장기적 전투도 없었다. 또한 이 두개의 돌무더기는 요새의 의미는 전혀없다.
왜담이 아닌 뙤담 즉 뙈놈이라면 오랑캐라 ,,, 고려때 70년간 이 땅을 밟은 몽고군에 항쟁때 몽고군이 쌓았다는 추정도..

그러나 이 돌 무더기는 반대쪽에서도 노상산에 그대로 노출될 각도일텐데 은폐나 엄폐의 성을 쌓았다는 논리는 부정확한 뜻을 내포한다.
일단 이 방추형 돌무더기는 인위적인 것은 사실이지면 이는 군사목적으로 부적격이라면 옛 선사인들의 강가에 무언가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선사시대의 어떠한 생활 패턴이 아닐까 하는..

*호구록 속에 왜의 대화 내용중 영월서 재천과 주천의 경계에서 길을 재촉하던 이유는 충청땅이기 때문이라던 글에서,.,
그러면 이 4번대는 오직 강원땅만 정복하고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감사의 직책을 내정하고 왔다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수구의 방어자세를 갖추면 공격도 힘들어 질텐데 정선서 평창을 넘어오며 평창을 그냥 그대로 별 노력없이 정복하였다. 그것이 유사점이 위 영원산성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8/24일 선발대가 영원산성으로 찾아들고 25일엔 본대가 올라갔지만, 원주의 빙허루에선 적장들이 잡혀온 포로들에게 김제갑옹의 파악에 고문을 가한다.
그러면서 26일엔 김제갑 부자의 목이 박스에 실려 서울 본영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지는 듯 하다.

즉 영원성의 4천명의 병력은 25일 모리부대에 3천명중 원주 잔류 병력을 제외한 적군에게 전투한번에 패하였다.
이렇게 삘리 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평창의 관군 70여명 중 절반이 조정의 명에 의해 문경새제를 막으라는 신립군대에 차출 당하였듯이 원주 도영에서도 문경새제에 차출 당하였다.( 신립은 기병으로 탄금대에서 패하였지만 처음 조정의 명은 문경새재의 빗장을  막으라는 명이었다)
그런 이유보다 심각한 현상은 왜병에 대하여 심한 조력자들 때문이다.

물론 6,25때도 쌀가를 걸머지고 수 Km줄의 행렬이 있었다지만, 역사에 그 유명한 안시성 전투에서 이세민이 패하고 돌아간 것은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역으로 까 뒤집으면 군사들이 한자리에 너무 오래 주둔되기에 그 일대의 차출할 수 있는 군량미도 다 떨어 졌다는 점이다.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도 보급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듯...역사에 가장 큰 문제는 도로와 수레비퀴가 튜브가 아니라는 점과 과거 전투엔 솥 그릇까지 수송에 어려움이 많은 듯하다.

호구록에도 비춰지는 조선인들의 노역도 어쩔 수 없지만 오히려 이 왜적의 전시체제 상황이 더 유리한 아첨꾼의 민족의 배신자 조선인도 많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終--------------
<임란당시의 평창전사의 역사서>
* 호구록<호구일록>은 임란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응암굴 전투와 항전의 모습, 그리고 원주감영에
포로로 잡혀가 탈출하는 순간의 기록들을 임란의 당사자로서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물론 당 전사의 개괄적 내용은 아니지만 날자별로 충분히 유추해 복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응암지는 임란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로 호구록과 유사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사서는
 임란 이후에 이를 추슬려서 서술하였고 1980년대에 한글로 해석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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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위의 서두에 프레임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프레임에 저의 글중 절반도 못 올라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나의 글 월정사편에 다수의 글은 우리가 배운 역사의 문젯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래의 내용들의 월정사 이해의 글은 시물레이션화된 사진과 도표등이 제 설명과 함께 못 올리기 때문에  그냥 올리면 이해불가가 되는이유에서이다.

월정사 8각9층석탑은 국보 제 48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북방형이다. 이방이라고 배웠다.
이방형이라면 국보로 삼지 말았어야 할게 아닐까??
이러한 문제에  이방이란 표현의 장본인들은  동탑을 '70년 해체 수리복원한 정영호 감독관과 문화재청의 기록관 홍사준의 리포트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그 일전의 구한말 이능화 선사의 월정사 탑이 13층 탑이라고 쓰고 최남선이 감수한" 조선불교통사"에서 13층이란 서술은 기단까지 잘못 헤아린 것이라고 이 두 사람은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 이들의 말이 진짜라고 믿어야 할 근거제시도 없는데 그런 오류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두사람의 당시의 동탑 해체복원의 레포트는 둘중의 한사람은 분명 표절이다.
이러면서도 왠지 알수없다고 해야 할 것을 기단까지 잘못 헤아렸다고  진위 파악도 않된것을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러한 그들의 독설은 팔각탑은 이방형이고 고구려형이란 주장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엔  목재의 8각탑이 다수 존재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것과 오대산 월정사는 양식이 틀리는 것이다.
 월정사는 신라의 명주군왕 후손의 범일국사에서부터 기인하는데 그들이 왜 고구려형을 주장할까??
다 부서지고 잔해만 모았슬텐데 그를 부활시킨다는 명분은 희박하다.
그것은 시대사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두사람은 이러한 양식의 시대사 개념의 사조를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후세백작은 월정사 8각9층 석탑이 13층이라랴 하는 이유등의 월정사 중창에 관한 수십 편의 글이 있지만 이 프레임에선 사진과 그의 작도등에따른 해설을 할 수 없기에 단 한편도 못 올릴 것이다.
이 후세백작 단 한사람만 동탑이 13층탑ㅇ이라 생각하지만 먼 후일에 어느 누군가도 나와 같은,,, 아니면 그런 기록문서가 발견되던 그대로 역사에 묻혀도 나로서는 지금의 9층이 아닌 원작은 13층이었다는 그러한 개념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신라 3층 석탑을 정형탑이라 명명한 학자들도 촌넘들,,, 그 탑밖에 모르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란 생각에 정형이란 용어를 붙이는 양식의 여유가 없는 학자들,,,
나로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이  1,200여 우리나라 탑파 중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문화양식이란 미학적 글까지 준비할 것입니다.

또한 가령 평창군에서 수항사지 탑을 구찰한다면 지금 두개의 옥개석만 남은 동 탑은 과연 몇개층이 원형일까요??
 여기에 나의 주장은 사진의 시물레이션화에 따른 설명인데 이들은 못 올린다는게... 그러고 문화원 싸이트엔 일반인이 더 게첨할 자리도 없다는 것에 유감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언제 기회에 평창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된 평창아리랑이 있다.
 그런데, 평창 문화원 홈피엔 평창아리랑이란 단어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분명 이 후세백작은 정선 아라리의 이론을 능가하는 평창아라리 이론을 정립할 것입니다.
평창아리랑은 정선 아라리의 아류가 아닙니다. 정선 아라리는 변절하여 제 기능성의 원음을 못 갖춘 짝퉁이지만 평창아라리는 엣 원음 그대로 보존되고 또한 오늘도 어디선가 한 수의 가락이 더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창아라리는 단순한 노랫말의 가락만은 아닌 것이다.
아라리는 이 지방 선인들의 삶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라리를 문화유산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잇는 것이다.
그러나 평창 문화원은 평창의 문화유산  평창아라리엔 관심없는 듯하여 이곳엔 게첨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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