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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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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3-01 01:43 조회4,114회 댓글0건

본문

[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원형을 찾아서...]
                                                                                          2013, 05, 18  高  柱  浩

  < 목  차>
*  서    론
*  본    론
    (1) 월정사탑이 8각13층 석탑이라는 역사기록 고찰
    (2) 탑의 제작기법의 생명선(임의의 사선)과  월정사탑에 적용
    (3) "임의의 사선"을 통해서 보는 월정사 8각9층탑의 제 문제는??
    (4) 월정사탑의 조형양식과 사회적 배경   
          1) 불교의 역사적 이해
            2) 고려 불교문화의 배경인 송나라 문화사
            3) 탑파의 일반론과 시대변천사
*  결      론  ;  월정사탑의 미학론과 시대적 사명감
              ( 서  론 )                                                                                                                   
이 글은 몇해전 저의 글 "월정사 중창의 허실"란 몇편의 글들에 이어 다시금 국보 48호인 월정사 8각9층석탑에
대해 史家들과는 다른 이견(異見)으로 同塔이 원래는 9층이 아니라 13층이었다는 문헌을 토대로 탑파(불탑)의
제작기술의 이해를 통하여 월정사 8각9층석탑은 원래 13층탑이었슴을 증명하려 한다.

인터넷에서 同塔의 사진을 볼때마다 이상한 느낌은 9층 옥개석이 그 위에 이어지는 상륜부의 노반에 비해 폭이
넓은 비정상적인 점을 느꼈었다.

그리고 또한 1970년에 월정사 해체, 복원 공사의 감독자인 정양호 선생의 리포트 글 "한국 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란 글에서 "13층이란 밑바닥 기단까지를 탑신으로 잘못적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글은
레포트 글로서는 너무나 황당하다는 느낌과 탑의 역사를 적는 사관이 최소한 탑신과 기단을 혼돈할까? 하는
의문보다 오히려 13층으로 잘못 적었다고 단정하는 그 글이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同塔의 13층이었다는 문헌상의 문제에 대하여 아래의 가칭 "석탑의 생명선은?" 이라는 제작원리를 통해서 보는
월정사탑의 제 문제와 그 원인은 원작이 9층이 이니라 13층이었어야 하는 논제를 제시한다.

본인이 개진한 월정사 탑은 원래 13층탑이었다는 아래의 논리에 대하여 앞으로 학계나 문화재청은 그 타당성과
당위성의 진위를 가려 주실것을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이 월정사탑은 원작자의 불교에 대한 믿음과 깊은 신앙심으로 불국토의 이상세계 구현을 위한 노력이
월정사 탑을 만들은 의도도 묻힌채 월정사 8각9층석탑에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異型이다, 또는 북방계이다,

고구려 양식이다라는 권위있는 학자들의 함구스런 촌평이후로 同塔은 고려양식을 모태로 한 화려하고 장엄한
수법과 빼어나고 수려한 조각의 탑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방인으로 치부해 버려서 신라의 정형탑에
비하면 너무나 홀대받는 탑이 되어 버렸다.

학자들이나 학계에서 홀대하는 同탑이 복고적이고 또한 북방계의 모방의 석탑이라면 왜 동탑을 국보48호로 
지정했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학자들의 그런 북방형이란 촌평이후 검색란에 모두들 월정사탑과 팔각석탑은 북방형이고, 이형(異型)이라는
짤막한 멘트들로 일관될 뿐. 고려시대의 8각탑들에 대한 미학적 글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북방계라면 북방은 고구려가 아닌 혹시 스키타이 문화를 이야기함인지, 또한 이를 이형(異型)이라 하기엔 오히려
고려말 원나라 기술자가 세운 경천사지 탑은 우리의 일상보다 다른 감을 느낄 수 있어 좋치만 그것은 버마, 태국
문화권의  탑파의 양식으로 이땅에 뿌리를 못 내리고 오직 그들의 모방이기에 우리의 예술로는 가치없는 것이고
그것를 이형이라야 옳치 않을까??

 지금 이 장에서 본인은 이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異型이 아니라 신라에서 출발한 우리의 전통양식 탑파의 수법의
계승, 발전시킨 찬란한 고려양식임에 위에 8각13층 석탑은 거대하고도 새로운 창조정신이 깃든 탑이라는 내용을
상세히 기술할 것입니다.

 월정사 탑은 문헌을 토대로 13층 탑이었슬 것이라는 이 탑의 원형과, 당 시대의 송나라의 선진문화의 차입이란
이해로 상륜부의 금동 철재조각은 금속공예로서 보다 당 시대의 철기문화의 상징으로 북방계이니, 고구려 풍이니
하는 간략한 수식을 떼어 버리고 시대사적으로는 선진문화 사조에 의한 예술이었다는 이해의 글로 이 월정사탑의
정제된 수려함은 우리의 1,000기의 모든 탑파중 조형적으로 가장 으뜸이라는 이해도 하고자 한다.

고려시대 불자들의 부처님에 대한 불심으로 진정 새로운 시대에 따른 새로운 가치관의 도전으로  찬란한 문화유산을
창조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고져 함이며, 앞으로 국보 48호 월정사 8각9층탑은 원래는 13층이었다는 저의 논제의
기술적 물음이 앞으로 학계에 검증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혀 동 탑에 원 제작자의 이상과 그 뜻을 유지하며 또한
동 탑이 더이상 이방인이 아닌 국보로서의 위상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단, 나는 불자도 아니며 역사가나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기에 많은 자료를 비교 검토하지 못한 점들은 후일 사가(史家)들의
몫으로 돌리며, 또한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탑의 숨은 생명선은 무엇인가?? "라는 저의 논제를 아래에 별첨한다.

*참고문헌
 < 참고 :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에 세존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문헌>
 朝鮮佛敎通史(조선불교통사)는 李能和(이능화)씨가 저작하였는데 부처님 舍利塔(사리탑)이 있는 곳을 기록하여 두었다

4,平昌郡五臺山所在月精寺十三層塔奉安世尊舍利
평창군의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의 13층탑에 세존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2016.3.1. 01;15

이 글의 각 항별 내용 그대로 문화재청에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원작은 13층 탑이었다라는  이의 신청을 하였던바
담당 시드 배정이 되고 한 달만에 답이 왔다.
그 답은 동 탑은 "70냔 국보 48호로 지정되었음을 사료해 달라....이 말인즉 국보로 지정햇기에 수정이 불가하단
이야기를 어렵게 표현한 것이고 또하나 문화재는 개인이 이의 신청이 않되고 지자체가 도 지자체의 의결을 거쳐서
문화재청에서  심의 한다고 한다.

그러면 문화재청은 인터넷으로 개인의 의견신청란은 문화재청의 위선이고 나에게 취하된데 따른 이야기는 없는가
하는 물음에 역사가들은 역사의 소명적 연구보다 때로는 역사를 능욕하는 자들이다라고만 표현했다.

저는 "70년 동 탑의 해체, 복원한 정양호 감독관과 문화재청의 기록위원 홍사준(부여 박물관장 역임)의 두 사람의
동 탑에 대한 보수공사 레포트를 입수하였다.
그 레포트에서 위 두 학자는 동 탑이 북방형이고 이방형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동 탑이 동 시기에 왜 국보로 지정되었슬까??
두 사람의 레포는 자기들의 의견이 옳고 이능화 선사가 쓰고 최남선이 감수한  조선불교통사에서 월정사 8각9층 석탑이
기단까지 헤아린 잘못이라 단정하는데 , 그에 근거는 무엇인가??
역사의 책을 마음데로 주무르는 그들,,,이것이 또한 오류라면 어떨까??
그러기에 그런 단정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위 두사람의 북방형이니 이단형이라는 의미는 동 탑의 불교적 역사의 관찰도 부족한듯 하다
그러기에  본 후세백작은 수십편의 월정사 문화편을 쓰며 동 탑이 북방형도, 이단아도 아닌 우리나라 탑파 양식중
제일 아름답고 또한 불국토라는 불교관의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예찬하고 있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동 탑이 명주 굴산사지의 범일국사 후계의 선종이지 고려초의 교종의 천태종에 유화한 것은 아니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특이한 점은 우리는 송나라 문화사를 역사에서 잘 모르고 있다.
수 없는 역사책을 뒤져도 그러한 내용이 없지만 우리 문화에 송나라 문화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로마라 해야할 송의 문화가 8각9층 석탑에 영향을 준 자세한 설명도 하고있다

그런데 이 이론들은 사진의 설명등이 많아 이 프레임에선 부적합하기 때문에 이해에 힘이 드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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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아라리<아리랑>에 대하여,,,]

또 하나 평창의 역사속 문화사중에 으뜸되는 것은 평창아라리(아리랑)이다.
영서의 메나리조 아라리는 하나의 노래의 감흥을 넘어서서 이땅의 선인들의 삶의 애환을 표출한 이땅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는 가락인 것이다.
 항간의 말로는 평창아라리가 성암령을 넘어 정선으로 가는 선비들이 정선에 전래했다하며 평창은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 말의 모순은 아라리는 선비들이 부르고 다닌 것도 아니며 정선에 그래 많은 선비들이
있었냐 하는 의문도,,
정말 정선 아라리는 평창아라리의 아류일까??
저는 앞으로 평창아라리의 제 이론의 확립으로 평창아라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부터 고찰 할 것입니다,
 정선은 아라리가 두문동에서 또한 오대산에 칩거한 이색의 시에서(김연갑의 정선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
 비롯된다는 어거지들 모두 일소하고 우리나라의 아리랑의 이해들부터 새롭게 창출해 보이겠습니다.

우리민족의 정서의 기조는 한마디로 함축하면 한(恨)입니다.
이 恨을 표출하는  단어는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가를  학자도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검증도 없이 설명하지만 그 모든 뜻은 시대적,환경적 지류의
이해이지 아리랑의 원뜻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람은 아리랑의 단어는 르완다어 에서 또한 어느 사가들은 드라비다 어와 공통적인 모습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아리랑이란 그 시원은 아마도 고대문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보아야 할듯하며.
정선아라리 이론자들처럼 그 시원에 혈안이 되어도 그것이 정선 아라리에 이론적 참 모습은 아닌 것이다.
또한 조용호 박사의 아리랑의 논리적인 이해,,
이런것은 민초들의 가락이 먼저이지 이러한 이론은 후에 맞추는듯한 어찌보면 전혀 필요도 없는듯하다.

아리랑의 뜻이 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또한 그것이 무엇이라고 찍어 붙여서도 아니된다.
우리는 그 뜻은 잊었지만 그래도 아리랑 한수의 가사를 새로이 만들며 즐겁게 부를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어적 뜻은 모르지만 그것이 그래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도 이곳 태백산간 영서지방의 평창에서는 대상리 아리랑이 불리어지며 또 한 수의 가사를 창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라리는 우리 일상의 삶의 문화로 제약도 기준도 없지만 민초들의 가슴을 울려주는 가락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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